2020/10/28 15:10

배트맨 비긴즈, 2005 대여점 (구작)


크리스토퍼 놀란을 할리우드 메인 스트림 내에서 틔우게끔 만들어준 불멸의 시리즈, 그 첫번째 작품. 이후 만들어진 <다크 나이트> 때문에 트릴로지 내에서는 좀 묻히는 감이 있는 영화인데, 개인적으로는 <배트맨 비긴즈> 역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재미있는 영화란 생각이 든다. 

영화가 찾는 건 결국 배트맨의 원년이다. 수퍼히어로 장르가 포화 상태에 이르른 지금이야 주인공들의 오리진 스토리 다루는 것이 이젠 기본 중에 기본일텐데, 사실 이 당시만 해도 배트맨의 그것을 제대로 다뤄낸 실사 영화가 전무한 상황이었다. 웃긴 건 지금도 마찬가지라는 거 이전의 팀 버튼 시리즈나 조엘 슈마허 시리즈들 모두 그걸 다루지는 않았었으니까. 어쩌면 바로 그 때문에 크리스토퍼 놀란이 이 시기 이 묘사에 더 탐닉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그러나 명확한 설계도가 다 나와있는 수퍼히어로 장르를 다룸에도 당시 신인에 가까웠던 크리스토퍼 놀란은 본인의 작가주의적 에센스를 이 작품에 결국 또 집어 넣고야 만다. 이쪽 장르의 영화들이라면 으레 연대기 순으로 주인공의 이야기를 다루기 마련이다. 그러나 놀란이 누구인가? 영화가 시간을 새겨넣는 예술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자신의 매 작품마다 비선형적 플롯 구성 등으로 그를 표현해내는 장인 아니었던가. 크리스토퍼 놀란은 배트맨이라는 수퍼히어로의 원년을 다룰 때에도 그 방식을 택했다. 영화는 어린 '브루스 웨인'이 부모를 잃고, 이후 자라 배트맨으로 성장해나가는 이야기를 순서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가 시작되면, 이미 브루스 웨인은 다 큰 성인의 상태다. 심지어는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부탄의 감옥에 갇혀있는 상황으로 시작됨. 그리고 영화는 중반부에서 과거가 현재를 따라잡는 시점 전까지는 내내 이런 식의 교차편집으로 진행된다. 감옥에서 버티고, 리그 오브 쉐도우에 의해 거두어져 훈련 받는 브루스 웨인의 현재. 그리고 부모를 잃은채 끊임없이 방황하는 브루스 웨인의 과거. 이 현재와 과거가 겹겹이 쌓이며 브루스 웨인이라는 캐릭터의 외면과 내면 모두를 조형한다. 특유의 편집 리듬감도 좋아서 썩 괜찮은 선택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듦. 

이어지는 2편이 ‘혼돈으로 인한 희생'을, 그리고 3편이 '스스로의 구원' 등의 테마를 잡았다면 이번 1편은 '공포를 통한 성장'이다. 그리고 그 ‘성장'과‘공포'라는 키워드가 영화의 메인 빌런들을 통해 발화된다는 점이 무척이나 훌륭하다. 뭐, 모름지기 수퍼히어로 영화라면 악당의 존재감이 중요한 거야 당연지사지. 그러나 그 중에서도 배트맨은 유독 훌륭한 빌런 로스터를 가진 수퍼히어로 아닌가. <배트맨 비긴즈>에서는 그 역할을 라스 알 굴과 허수아비가 맡는다. 일단 영화 외적으로는 단 한 번도 실사 영화화 된 적 없는 악당들이었단 점에서 신선하다. 그리고 영화 내적으로는, '라스 알 굴'과 '허수아비'가 각각 '성장'과 '공포'의 테마를 확실하게 갖고 있는 악당들이란 점에서 훌륭하고. 

라스 알 굴이라는 이름으로 암약하는 '헨리 듀카드'는 말그대로 브루스 웨인을 성장 시킨다. 막말로 그가 아니었더라면 배트맨은 없었을 것이다. 브루스 웨인을 만나기 위해 그가 부탄 감옥으로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웨인은 그저 범죄 부랑자 생활 전전하다 운 나쁘면 객사했겠지. 일단 라스 알 굴은 그를 거둬 먹여살렸고, 혹독한 훈련과 가르침을 통해 그를 육체적으로 성장시켰다. 그리고 그 스스로는 전혀 예상 못한 전개였겠지만, 본인의 자비없고 가혹한 정의관으로 인해 브루스 웨인이 스스로 그만의 명확한 기준을 세우게 되는 데에도 일조 했으니 정신적으로도 성장시킨 게 맞다 봐야겠지. 이 캐릭터가 또 재밌는 게, 대사를 진짜 재밌게 썼다는 거다. 부탄 감옥에서 처음 조우한 브루스에게 '전설' 멘트로 영업한 것도 대단하고, 이후 자신의 집을 태워먹은 브루스를 찾아와 네 집도 태워먹겠다고 하며 정의의 미덕은 공평이라는 궤변을 늘어놓는 것도 재밌음. 웬 광대놈은 그거 혼돈의 미덕이라카던데 진짜 멋진 건 그 역할을 리암 니슨이 연기했다는 거. 키도 장신인데다 목소리까지 좋고, 무엇보다 현명한 스승 캐릭터 전문 배우였다보니 더 확 와닿는 것도 있음. 

이어지는 킬리언 머피의 허수아비. 이 새끼는 헨리 듀카드와 완전 반대선상에 있는 인물이다. 정의나 대의 이딴 건 관심없고 그냥 돈이나 좀 만져보면 어떨까-하는 세속적인 마인드. 더불어 체술로는 배트맨도 쌈싸먹을 수 있었던 헨리 듀카드에 비해 이 새끼는 체술도 형편없음. 공포 가스 하나 믿고 존나 나대는 모습이 개 웃긴다. 심지어 그거 써먹는 것도 실패할 경우가 더 많음. 그리고 무엇보다 킬리언 머피가 쓰고 다니는 안경이 너무 킬링 포인트라는 거. 한 눈에 봐도 존나 촌스럽고 변태같다. 이거 소품 대체 누가 찾은 거냐. 소품팀 좀 챙겨줘라, 진짜. 

팀 버튼이 표현주의적, 조엘 슈마허가 만화적 연출로 고담을 빚었다면 크리스토퍼 놀란은 사실주의적 관점으로 이 세계를 재창조 해냈다. 그러다보니 라스 알 굴과 허수아비 역시 현실적으로 리뉴얼 되었다는 게 재미있다. 심지어 잘 했음. 원작에서 라자러스 핏을 통해 불멸의 힘을 얻었던 라스 알 굴은 그 이름을 후대에 물려주고 또 물려주며 카게무샤를 통해 지키기까지 했다는 설정으로 훌륭하게 재창조 됐다. 여기에 허수아비도 그렇고. 물론 허수아비는 원작에서도 비교적 현실적인 캐릭터였기 때문에 많이 바뀐 건 없는 모양새다. 그래도 그 존나 웃긴 허수아비 복장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입고 다니는 건 아니잖아. 

더불어 고담시 프로덕션 디자인 자체에도 놀란의 사실주의적 연출이 많이 들어갔다. 세트 촬영 위주로 진행했던 팀 버튼 & 조엘 슈마허와는 달리 놀란은 실제 로케이션 촬영으로 승부를 봤고 그게 꽤 먹혔다. 근데 고담시의 할렘가라 할 수 있을 내로우스는 또 세트와 CG로 멋지게 만들어놨음. 여기만큼은 팀 버튼의 시대착오적 분위기와 잘 맞는 모양새다.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 놀란이 스텝과 배우들에게 <블레이드 러너> 들먹이며 이런 룩을 원한다 했다던데 그래서인지 내로우스 쪽 분위기는 <블레이드 러너>의 LA 생각 많이 남. 

조금만 더 덩치를 키우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이 남긴 하지만, 그럼에도 크리스쳔 베일은 배트맨이자 브루스 웨인으로서 훌륭한 연기와 육체를 보여준다. 굳이 초점을 명확히 하자면 배트맨 보다는 브루스 웨인으로 더 멋진 배우였다고 하고 싶네, 개인적으로는. 이외에도 극의 무게감을 잡아줄 명배우들로 조연진 리스트를 융단폭격한 크리스토퍼 놀란의 용병술도 실로 탁월하고. 마이클 케인이나 모건 프리먼 등은 더 말할 것 없을 것 같은데, '고든' 역할의 게리 올드먼 만큼은 한 번 더 꼭 언급하고 싶었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 버튼버스, 슈마허버스, 놀란버스, 스나이더버스, 레고버스 등의 모든 유니버스를 통틀어서 가장 멋진 고든이었다. 이미지로도 원작과 찰떡이었고, 게리 올드먼이 언제 악역 전문 배우였던가- 싶어질 정도로 강직하고 선한 인상의 국가 공무원을 멋지게 연기 해냈음. 맷 리브스의 <더 배트맨>에서 제프리 라이트가 연기하는 버전의 고든이 어떻게 나올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어쨌든간에 내 최애 고든은 결국 게리 올드먼의 그것이다.

영화를 좋게 봤든, 나쁘게 봤든, 아니면 어중간하게 봤든. 그 누구라도 크리스토퍼 놀란이 자기만의 뚜렷한 색채로 배트맨을 재해석했다는 점 만큼은 부인하기 힘들 것이다. 심지어 이 때는 액션 연출도 나쁘지 않았어! 하나부터 열까지 본인이 직접 다 한 건 아니겠지만, 하여튼 대인격투든 자동차 추격전이든 스턴트 설계가 다 잘 되어 있어서 놀랍기도 한 작품. 역시... 한 사람이 너무 큰 권력을 갖게 되면 안 된다니까... 이 때의 놀란은 그 정도 급이 아니었으니...

개인적으로는 3부작 중 <다크 나이트>와 거의 동급 수준의 재미를 갖춘 영화였다고 본다. 물론 그 매력은 서로 많이 다르지만. 재미의 총량으로만 따지자면야 <다크 나이트>와도 견줄 수 있을 것 같다-라는 게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뱀발 - 텀블러라는 새로운 배트모빌의 데뷔전으로써도 존나 훌륭하다. 솔직히 지금까지 나온 모든 배트맨 관련 미디어믹스 중 가장 훌륭한 배트모빌이었다고 생각한다. 존재감 개쩔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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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ㄴㅂ 2020/10/28 19:21 # 삭제 답글

    이 영화가 지금껏 나온 중 최고의 배트맨 영화라 생각하는 게, 항구에서 팔코니 패거리를 제압하는 시퀀스가 정말이지 배트맨 스러웠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이쪽 장르의 거물 중 거물이면서도 배트맨이 유니크한 점은 한낮에 안 싸운다는 것, 어지간해선 잡졸들에게 정면으로 달려들지 않는다는 점이라 생각하는데, 이 영화는 범죄자 시점에서 배트맨이 조성하는 공포를 보여주는 게 정말 끝내줬어요. 심지어 '암 뱃맨' 하기 전까진 배트맨 얼굴도 제대로 안 잡아주고 휙휙 넘기는 점이... 또 배트 가제트들의 도색이나 디자인도 가장 깔끔해서 무척 좋아합니다.
  • CINEKOON 2020/11/04 20:06 #

    근데 최종편에서는 왜 대낮에 허우적대며 싸우고 그랬을까... 하여튼 이 트릴로지의 첫편과 두편은 참 마음에 드는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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