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28 15:48

다크 나이트, 2008 대여점 (구작)


크리스토퍼 놀란이 빚어낸 수퍼히어로 장르계의 새 역사. 우리 시대의 새로운 고전. 그야말로 모던 클래식. 그러나 또 한 편으로는, 수퍼히어로 장르 영화라고 하기보다는 그냥 범죄 액션 드라마라고 불러야할 것만 같은 영화.

<다크 나이트>에 대해 이야기할 때, 꼭 먼저 그 '룩'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렇다. 나는 <다크 나이트>가 테크니컬한 부분에서의 강점이 생각보다 더 큰 영화라고 생각한다. 물론 영화의 줄거리나 캐릭터, 품고있는 함의나 메시지 역시도 훌륭들하지. 허나 <다크 나이트>를 떠올릴 때면 난 언제나 그 특유의 푸른 톤과 쨍한 선예도로 빚어낸 날선 이미지들이 먼저 떠오른다. 

아이맥스 카메라로 촬영된 극영화라는 점에서 분명한 강점이 있다. 촬영감독 월리 피스터가 빚어낸 영화의 룩과 찰떡같이 붙는다. 레터박스를 넘나드는 화면은 크고 웅장하며, 극강의 선명도는 영화의 이미지를 그냥 정의 해버린다. <배트맨 비긴즈> 역시 재미있는 영화였지만, <다크 나이트>에 비하면 뭔가 좀 뿌연 느낌의 화면이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자아내거든. 그 영화 특유의 노란 갈색 톤도 거기에 좀 일조하고. 그러나 <다크 나이트>는 소위 말해 일단 그 때깔이라는 것이 기막히다. 언제봐도 좋은 레퍼런스급 비주얼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옆동네의 스파이더맨이 그렇듯이, DC에서 불행 담당은 언제나 배트맨이었다. 때문에 그는 이 영화에서도 역시 고통받는다. 부모를 잃은 천애고아, 거기에 자기를 거둬살린 스승을 본인 손으로 죽게 내버려둘 수 밖에 없었던 그 비극의 굴레가 <다크 나이트>에 와서는 그 정점을 찍는다. 여기선 배트맨으로서 그나마 가지고 있던 명예와 신념 마저도 다 꺾이잖아. 명색이 수퍼히어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다리를 절뚝이며 개들에 쫓긴채 도망가는 주인공의 모습으로 영화를 끝낼 수도 있다니 이쯤 되면 이게 크리스토퍼 놀란과 워너브라더스의 패기인지 객기인지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 뭐, 결론적으로는 둘 중 무엇이었든 상관 없었겠지만.

하여튼 사랑하는 여자까지 잃고 본인이 점찍어둔 후계자마저 영혼의 지옥으로 떨어진채 파국으로 치닫게 되었으니 배트맨 입장에서야 최악의 불행을 경험한 것이지만, 그 감정적/철학적 파토스가 오히려 영화를 더 추켜세워준다. 그러니까 각본이 묘하게 짤짤이를 잘 넣는 느낌이다. 여자친구만 죽었으면 그냥 슬프고 마는 거지. 근데 그 여자친구가 주인공이 아니라 다른 남자와 결혼 하겠다는 편지를 주인공에게 남기고 죽잖아. 그럼 그냥 슬픈 걸로는 안 끝나는 거다. 그냥 새드 스토리가 아니라, 그야말로 비극이 되는 거지. 하비 덴트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 차세대 법 집행자로서 정의를 수호할 것처럼 보이던 사람이 악당들의 손에 의해 죽었다? 그럼 그냥 화나고 마는 거지. 근데 그 검사가 죽기 전에 타락해 이 사람 저 사람 다 쏴죽이고 다니는 악당으로서 죽었다? 그렇게 되면 그냥 화나고 마는 이야기로 끝나는 게 아니라, 거기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무력감과 절망감이 동반되는 거다. 영화가 그런 걸 썩 잘했다. 이건 각본의 승리다.

냉정히 말해 이 영화에서부터 크리스토퍼 놀란의 단점이 명백하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바로 대인격투 등의 액션 연출을 잘 못한다는 것. 오프닝 직후 배트맨이 허수아비 일당 + 배트맨 카피캣들과 벌이는 액션부터 이게 뭔가 싶어지더니, 이후 하비 덴트 후원회에서 벌어지는 조커 패거리들과의 싸움 역시 허우적대는 모션으로 안쓰러움을 산다. 그리고 진짜 솔직하게 말하면, 클라이막스에서 조커와 벌이는 1vs1 매치가 제일 최악이야. 거기는 배우들의 호연과 재미있는 상황 그 자체로 술술 넘어가는 거지, 배트맨과 조커의 격투 구성을 보면 좀 실소가 나온다. 하여튼 놀란이 이런 건 되게 못한다. 도무지 이해가 안 가네, 그냥 실력 좋은 스턴트 담당자 제대로 붙여서 연출하면 될 것 같은 장면인데.

그런데도 놀란이 또 대단한 것은, 그런 단점을 자신의 다른 장점으로 메워버린다는 것이다. 이 양반이 대인격투 액션 자체는 연출을 못하지만, 자동차 추격전이나 급박한 상황을 연출하는 것 등은 또 굉장히 잘해요. 게다가 각본이 갖는 근본적 힘이 더해지잖아. 그러다보니 대인 액션에서의 한계가 좀 가려지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아닌 게 아니라 배트포드 나오는 장면들은 하나도 갖다버릴 게 없을 정도로 멋지고 재미나거든. 그냥 그런 거에 정신 팔려서 다른 허접한 부분들을 안 보게 되는 거지. 쓰고보니 존나 화전양면 전술이네.

<배트맨 비긴즈>가 '라스 알 굴'과 허수아비를 통해 공포와 고통으로부터 연유한 성장을 보여주었다면, <다크 나이트>는 명실상부 최고이자 최악의 악역 조커를 통해 배트맨을 혼돈의 구렁텅이로 빠뜨린다. 어떻게 보면 조커는 지극히 데우스 엑스 마키나적인 캐릭터다. 하나의 살아 숨쉬는 캐릭터로서 존재하는 인물이 아니라, 그냥 전지전능한 각본가의 시점으로 쓰여지고 또 존재하는 인물에 가깝지. 그게 다른 캐릭터였더라면 형편없는 개연성과 비현실성으로 욕만 잔뜩 먹었을 것인데 반해, 다른 인물도 아니고 바로 그게 '조커'였다는 점에서 영화가 탄력을 받는다. 조커는 그냥 그래도 되는 캐릭터인 것이다. 원작에서도 그랬고, 때문에 관객들에게도 전부 익스큐즈가 된다. 그리고 꼭 원작에서 그런 캐릭터가 아니었다 하더라도, 이 영화가 내세우고자 하는 메시지와 설정들에 있어서는 그게 또 잘 맞았으니 그냥 그걸로 된 거. 

배트맨이 물리적/육체적으로는 조커를 상대로 이겼지만, 정신적/영혼적으로는 탈탈 털리며 졌다는 게 재미있다. 세상에 어떤 수퍼히어로 영화가, 그것도 제아무리 후속편이 기획되어 있다 할지라도 주인공이 악당에게 패배하는 것으로 끝낼 수 있을까. 그 부분의 연출 역시 훌륭하다. 조커는 배트맨에 의해 고층건물에서 내던져지고, 또 배트맨은 그런 조커를 와이어 감아 살려준다. 180도 뒤집힌 조커와 대화를 나누는 배트맨. 그러나 여기에서, 카메라는 뒤집힌 조커에게 또 뒤집힌 앵글을 선사한다. 뒤집어져있지만 알고보면 뒤집히지 않은 것. 거꾸로 매달려 있지만 다시보면 풍선처럼 떠오르고 있는 것. 그게 바로 조커고, 크리스토퍼 놀란은 이를 명백한 카메라 움직임으로 잘 보여준다.

사실 나온지 12년이나 된 영화고, 그동안 히스 레져의 조커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가지 말들이 나올대로 다 나온 상태이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려고 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스 레져의 조커를 언급하지 않기가 불가능한 영화다. 원작을 100% 반영한 해석이라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나는 그가 실사 영화화된 조커들 중 최고의 조커였다고 생각한다. 원작 반영 퍼센트로만 따지자면야 잭 니콜슨의 조커가 최고겠지. 화제성이나 연기력으로 따지면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 역시 꿇리지 않을 거고. 그러나 히스 레져의 조커는 그야말로 '조커 카드'로 쓰인 캐릭터로서 최고의 캐릭터성과 연기를 보여준다. 여기엔 이견이 없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토드 필립스의 <조커> 역시 좋은 영화였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조커라는 캐릭터에게 그리 많은 사연을 붙여줄 필요는 없었다고 보는 주의라. 

하여튼 대단한 영화. 개인적으로는 아직까지도 크리스토퍼 놀란의 최고작이라고 생각하는 영화. 근데 굳이 한마디 보태면, 수퍼히어로 영화로 보기에는 좀 애매하다는 게 내 생각이기도 하다. 스스로가 수퍼히어로 영화라는 걸 좀 부끄러워하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계속 수퍼히어로 영화 아닌 것처럼 보이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서 장르의 팬으로서는 그게 좀 아쉽다.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져><어벤져스> 같은 거 보면 그 자체로 준수한 완성도를 보여줌과 동시에 스스로가 수퍼히어로 장르 영화라는 것을 공고히 하잖아. 근데 <다크 나이트>는 왠지 주인공 브루스 웨인 역할에 수퍼히어로 아닌 다른 오리지널 캐릭터 하나 끼워넣어도 상관없을 것 같아서... 단지 꼬투리 잡기이긴 한데 그냥 그렇다고...

뱀발 - 케이티 홈즈의 연기력 보다는 매기 질렌할의 그것이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케이티 홈즈의 캐스팅이 유지됐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란 생각을 갖고 있다. 매기 질렌할 역시 물론 매력있지. 그렇지만 그런 걸 떠나 시리즈 영화에서는 최대한 배역 캐스팅이 유지되는 게 좋다는 인식을 갖고 있어서... 아니면 <배트맨 비긴즈> 때부터 매기 질렌할이었어도 되고... 하여튼 이 캐스팅 변경 하나 때문에 3부작 전체에서 좀 몰입 깨지는 감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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