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04 19:43

터보, 2013 대여점 (구작)


애니메이션은 의외성으로 버티는 매체다. 그래서 못생긴 오우거는 공주와 맺어져야 하고, 뚱뚱하고 게으른 팬더는 무술 고수로 변모해야만 하며, 모험의 주체가 되는 건 젊은이가 아닌 늙은이, 더러운 생쥐가 엄청난 요리 실력으로 셰프 자리에 오르는 것, 나약하고 조그마한 토끼가 거대 도시의 영웅 경찰이 되는 등 기존의 편견을 박살냄으로써 교훈과 신선함까지 줄 수 있어야하는 매체. 그리고 그 매체의 선봉장들 중 하나인 드림웍스가 캐치해낸 것은 달팽이와 레이싱의 조합이다. 느린 걸로는 별주부 뺨싸다구도 칠 수 있는 달팽이가 빈 디젤 흉내를 내야한다- 이 말이다.

문제는, 그 아이디어가 신선한지 잘 모르겠다는 거다. 지구 대표 느림보로 잘 알려진 거북이나 지렁이 같은 동물들이 레이싱카처럼 갑자기 빨리 달릴 수 있게 된다는 아이디어. 드림웍스 기획부서 회의에서 나왔을 이 아이디어에 그 회의에 참가했던 사람들 중 과연 몇 명이나 긍정이었던 걸까. 아니면 그냥 드림웍스의 전체적인 감이 떨어진 건가? 개인적으로는 그리 썩 신선한 아이디어 같지 않다. 

실재했을 때 공감할만한 구석이 없다는 게 문제인 것 같다. 더러운 병균 덩어리 생쥐가 프랑스 1급 레스토랑에서 요리를 한다고? 듣기만 해도 몸서리 쳐지지 않나? 실제로 생쥐가 인간 말을 알아들으며 요리를 해낸다면 그것 자체로 신기하기는 하겠지. 근데 거기에 플러스 알파로, 상상했을 때 일단 인상을 찌푸리게 되잖아. 못생긴 괴물 오우거가 일국의 아름다운 공주와 결혼을 한대. 그럼 그거 역시 그 자체로 신기하긴 하겠지만, 내가 그 공주에게 감정이입 했을 땐 역시 또 복합적인 감정이 들기 마련인 거거든. 그 못생긴 오우거랑 남은 평생을 함께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잖아! 아니, 그리고 우리를 다 죽이러 오는 악당에게 맞설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바로 그 뚱뚱하고 게으르고 먹는 것 밖에 모르는 팬더라고? 아이고 맙소사, 우린 다 죽었어!

위에서 예시를 들었던 영화들은 그 자체로 신선함과 동시에 감정을 확 끌어당기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터보> 같은 경우엔 그 후킹이 좀 약하다. 일개 달팽이가 자동차 보다 빨리 달릴 수 있다면 존나 신기한 건 맞지. 근데 그래서? 뭐? 어쩌라고? 달팽이가 빨리 달린다면 그 자체로 신기하겠지만 그 이상의 감정적 몰입 여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다. 차라리 달팽이를 주인공으로 삼을 거였다면 <라따뚜이>처럼 배경을 미국 말고 프랑스로 해서 달팽이 요리 해먹으려는 인간들을 피해 레볼루시옹을 일으키는 달팽이들의 레미제라블로 가는 게 훨씬 더 재밌지 않았을까. 개 뻘소리지만 그만큼 지금 기획의 후킹이 약하다는 것이다.

그래도 이미 영화는 만들어진 상황. 그렇다면 영화는 뭘 해야 했을까? 기획에 난점은 있었지만, 이왕 만들 거라면 '질주'의 그 쾌감 하나만큼은 영화가 꼭 쥐고 있었어야만 했다. 다른 거 다 필요없고 딱 그것만을 위한 이야기인 거잖나. 고속질주하는 레이싱카들 사이를 빠르게 제치고 앞서나가는 달팽이의 괴랄한 이미지. 그럼 <포드 vs 페라리> 같은 다른 레이싱 영화들처럼 고속질주의 그 쾌감과 맹렬함 하나만큼은 꼭 표현 해냈어야만 하는 거 아니냐고. 그러나 영화가 그걸 못해낸다. 주인공 달팽이인 '터보'는 그저 달릴 뿐이다. 자동차 배기음과 상향등을 켠 상태로 달리기만 할 뿐, 영화가 표현해내는 빠른 속도의 감각은 무뎌져 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심지어 애니메이션이잖아. 구도나 앵글 등의 촬영 및 조명적 요소에서 실사 영화보다 훨씬 더 유리한 매체잖아. 근데 그걸 이렇게 밖에 안 했다고? 존나 얼탱이가 없을 뿐.

보는동안 재밌었던 건 그 분의 등장 뿐. 웬 딥다크 달팽이가 하나 나와서 굵은 턱주가리 하나 믿고 존나 깝치려들길래 누군가 싶었는데 목소리 배역이 사무엘 L 잭슨이었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오시는 줄도 몰랐는뎈ㅋㅋㅋㅋㅋㅋㅋ 아... 너무 반가워요, 형...

뱀발 - 이미 프랑스 드립치기는 했는데, 여기 나오는 레이싱 경주가 인디500이 아니라 르망24였으면 주인공들 너네 다 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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