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14 14:11

내가 죽던 날 극장전 (신작)


영화는 담백한 미스테리물이다. 범죄 오락 영화 다음으로 한국에서 가장 많이 만들어지는 장르가 또 미스테리 스릴러 장르일텐데, <내가 죽던 날>은 '미스테리 스릴러'라기 보다는 '미스테리'물로 남는다. 이런 종류의 영화에서 흔히 연출되는 짜리몽땅 카체이스 장면이라든가, 숨어있는 누군가가 튀어나오는 점프 스케어라든가 그런 전형적인 장르적 클리셰들은 일절 없음. 오히려 미스테리 드라마로 규정짓는 게 더 맞는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건 한 소녀의 죽음 이면에 담긴 미스테리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주인공 '현수'의 내면이기도 하니까. 


내가 스포하던 날!


영화의 초반 지점에서 관객들에게 제시되는 미스테리는 크게 두 가지다. 일단 가장 표면적인 건 죽은 것처럼 보이는 소녀에 대한 미스테리다. 전북 고창의 외딴 섬에서 증인 보호 프로그램의 일종으로 거의 갇혀살다가 끝내 죽음을 택한 소녀. 이 소녀는 왜 죽었고, 그 죽음 직전까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그것이 주인공인 현수와 관객인 우리들에게 주어진 첫번째 미스테리다. 이어지는 두번째 미스테리는 주인공인 현수 그 자체에 대한 것. 영화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이미 현수는 모종의 이유로 병가를 내고 공백기를 가졌던 인물로 묘사된다. 그리고 그녀의 주위를 서성거리듯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주변 인물들. 모두가 그녀의 공백기에 대해 말하고, 그 공백기의 이유에 대해 쑥덕댄다. 관객들은 외딴 섬에서 생을 마감한 소녀의 죽음 이면에 도사린 미스테리와 더불어 주인공 현수의 이러한 미스테리도 함께 풀어나가야 한다.

우리는 누군가와 대화를 함으로써, 또는 상대의 표정을 보고 또 그걸 읽음으로써 상대방의 입장과 감정에 공감하게 된다. 영화는 딱 그걸 그리고 있다. 현재 시점의 현수는 죽은 소녀의 과거 시점이 담긴 CCTV 영상과 소녀가 남긴 글과 소품들을 통해 그에 이입하게 된다. 소녀가 CCTV를 향해 지어보이던 반항스러운 표정과 외로운 몸짓은 현수의 그것과 닮아있다. 현수가 거울을 통해 수도없이 마주쳤던 그 표정. 현수는 이를 알아보고 이미 죽은 망자의 영혼이라도 달래려는듯 필사적으로 이 사건에 몰입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교차편집이 자주 튀어나오는 영화이기도 하다. 과거 시점의 소녀와 현재 시점의 현수는 끊임없이 교차편집되며 하나의 인물로 서서히 겹쳐져보인다. 재밌는 건 샷 디자인을 비롯한 연출과 그 편집 타이밍이 이를 잘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 시점의 소녀는 하얀 커텐 뒤에서 조용히 다가오는 것으로 집안을 관찰한다. 그리고 그 씬 직후에 이어지는 것은, 현재 시점의 현수가 하얀 커텐 뒤에서 조용히 다가와 집안을 관찰하는 쇼트다. 이렇게 소녀와 현수는 반복되고 교차되다가, 끝내는 맞붙게 된다. 

소녀는 죽음을 택했을지언정, 그 결정까지 가는 데에도 많은 분투를 했다. 주위 사람들에게 작고 반항적이게나마 마음을 나눠줬고, CCTV 카메라를 향해 억울함과 분통함을 표현했으며, 그로인해 현재 시점의 현수에게 닿을 수 있었다. 거기서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쩌면 삶은, 지고 패배할지언정 내가 맞서고 분투했던 자국들을 기어코 남겨내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그냥 무조건적인 항복을 취하고 그저 상황과 현실에 바스러져가는 것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싸워내고 버티어냈다는 증거를 남김으로써 나를 바라볼 뒷사람들에게 일말의 희망이라도 전달해야만 하는 것. 국사 교과서 같은 거 보면 그런 말이 자주 나오잖나. '결사항전'. 결국 굴욕적으로 패배하고 온통 도륙 당했을지라도, 내가 여기 서서 끝까지 싸웠었다는 것을 기필코 알려야하는 것. 어쩌면 이게 희망이 아닌가. 그리고 그런 희망이 우리 삶에 꼭 필요한 것 아닌가. 소녀가 지켜낸 그 결사항전의 태도에 결국 현수는 감복하고 또 동화된다. 그렇게 모든 걸 포기하고 놔버린 듯 하던 현수는 다시금 자신의 삶을 꽉 붙잡는다. 훌륭한 메시지다.

영화의 반전 역시 그 메시지를 잘 발현시키는 좋은 전개다. 알고보니 소녀가 죽지 않았다는 반전. 자신의 죽음을 위장한채 지구 반대편 다른 어디선가 꿋꿋이 살아나가고 있다는 설정. 비록 이런 장르의 영화들에서 흔히들 사용하는 뻔한 반전이었지만 그럼에도 영화의 메시지와 잘 부합하는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삶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드는 영화이니, 소녀가 자살로 죽었으면 말이 안 되는 거지, 그게.

다만 이 반전까지 가는 데의 묘사가 좀 부족하다는 점은 아쉽다. 소녀는 분명 자살하려 했다. 그러나 '순천댁'과의 교감과 그녀의 도움을 통해 이 선택에서 벗어난다. 그런데 딱 여기에서의 감정과 관계 묘사가 부족하다. 물론 순천댁과 이 소녀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감동적이고 아름답지. 허나 자살하려던 소녀의 마음을 돌린 것 치고는 순천댁과 그 소녀의 관계가 너무 헐겁고 피상적으로만 묘사되어 있다. 일종의 유사모녀 관계로 다 퉁치려던 느낌. 이 둘이 어떻게 가까워졌고, 또 어떻게 마음을 나누게 되었는지에 대한 과정을 좀 더 깊숙하게 묘사했더라면 더 설득력있는 반전과 결말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이걸 또 늘리면 영화의 미스테리가 지나치게 헐거워지고 설명적인 느낌이 된다는 단점 역시 있었겠지만. 

담백하거나, 싱겁거나. 미스테리 장르 영화적 재미를 기대하던 관객들에게는 그저 싱거운 영화로만 느껴질 수도 있겠다. 그래도 나는 담백하게 봤다. 꼭 추격씬이 하나씩 있어야 하고, 어두운 곳에서 용의자가 툭하고 튀어나와 주인공과 관객들을 놀래켜야만 하고. 이런 자극적이고 뻔한 양념들 없이 그저 담백한 맛의 영화가 끌릴 때도 있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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