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23 13:08

극장전 (신작)


잘 만든 영화인 것은 맞다. 장르적인 재미도 분명 충만하고, 배우들의 호연과 더불어 감독의 내실있는 연출도 돋보인다. 다만 감독의 바로 직전작이 <서치>였다는 게 너무 컸을 뿐.


런 스포 런!


매번 말하지만 잘 만든 좋은 영화는 첫 쇼트나 첫 씬에서 영화 전체를 요약해내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런>의 오프닝 쇼트는 인상적이다. 고요하지만 다급해보이기도 한 어두운 수술실. 수술대를 빙 둘러싼 의사와 간호사들. 그들 중 카메라를 가리고 있던 의사 한 명이 비켜서자, 영화는 조그마한 반전 하나를 선보여낸다. 다른 그 누구도 아니고, 수술대에 누워있었던 것은 주먹만한 작은 신생아였다. 못해도 성인이 누워있었을 것만 같았던 큰 수술대에 처량하면서도 곱게 누운 아기 하나. 그 자체로 신선한 반전인 동시에, <서치>에 이어 감독이 주무기로 골라낸 것이 '기만' 전술임을 명백하게 드러내는 쇼트다.

아닌 게 아니라 영화의 전체적인 내용과 그 반전도 모두 '기만'이었으며, 그 뿐만 아니라 영화 곳곳에 이러한 기만적 연출들을 심어놓았다. 주인공인 '클로이'가 아닌 밤 중 인터넷 검색을 하고 있을 때 그 레이어 뒷편으로 사사삭 전개되는 ''다이앤'의 소름돋는 실루엣 등, 그 기만 전술을 호러 스릴러적으로 적절하게 써낸다. 또, 코미디로써도 쓰는 부분 역시 있다. 클로이가 약국 문을 박차고 여러 선반들 사이를 헐레벌떡 넘나들다가 마주치게 되는 카운터 앞의 긴 줄. 이렇게 여러 레이어를 벗겨내며 본질을 드러내는 방식을 유머 아닌 유머로써도 잘 쓰고 있다. 

그 밖에 <서치>에 이어 감독의 작가주의적 면모가 돋보이는 인터넷 검색 장면이나 전화 통화 장면 등, 스마트폰과 구글링이 일상화된 21세기의 호러 스릴러로써는 현 시대를 잘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현실적이고 또 신선하다. 아니쉬 차간티가 만드는 영화들 외 요즘 만들어지는 호러 스릴러 영화들은 그 대부분이 21세기의 기술문명을 알면서도 모른채하지 않나. 스마트폰과 CCTV가 쫙 깔린 현대 사회를 배경으로 호러, 스릴러를 만드는 게 예전의 그것에 비하면 분명 어려워진 게 사실일 테니까. 허나 아니쉬 차간티는 타협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점들을 확실하게 영화 속으로 끌고 옴으로써 관객들의 현실감을 돋군다.

다만 이런 종류의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는 반전에 그 문제가 있다. 이건 누가 뭐라해도 미스테리 스릴러다. 그럼 그 미스테리를 관객들에게 잘 숨겨야한다. 적어도 중후반부까지는. 그러나 이 영화는 오프닝에서부터 그 패를 모두 까버리는 편에 속한다. 다이앤이 자신의 신생아 딸을 보며 "그래도 살 수 있겠죠?"라고 의료진에게 물었을 때, 편집은 거기서 쇼트를 돌렸어야 했다. 그러나 영화는 아무 말 하지 못하는, 그래서 그 딸아이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처럼 보일 수 밖에 없는 의료진의 침묵까지 담음으로써 결국 이후 전개의 청사진을 관객들에게 모두 넘겨버린다. 막말로 예고편 볼 때부터 진실은 둘 중 하나였다. 다이앤이 클로이의 친모이거나, 아니거나. 적어도 50/50의 확률이란 게 존재했다. 그러나 이 오프닝 씬에서부터는 그마저도 하나로 좁혀져버린다. 의료진의 침묵까지 담아버렸으니 아무래도 다이앤이 클로이의 친모가 아니었던 것으로 갈 확률이 크지 않은가. 그리고 실제로 영화가 그렇게 한다.

오프닝 씬에서부터 미스테리를 드러내버리고, 그 배후 이야기의 디테일을 본격적으로 설명해내는 중후반부는 확 늘어진다. 전반부는 분명 괜찮은 리듬을 갖고 있었던 영화이지만, 클로이가 다이앤의 진실을 알아채고 둘의 구구절절하고 재미없는 대화가 지속되기 시작하는 중후반부부터 영화가 제대로된 흐름을 잃는다. 클로이와 다이앤 둘이서 '넌 내가 필요해', '난 네가 필요없어' 이런 뻔하고 뜬구름 잡는 이야기들만 하고 있으니 이게 재미있을 리가.

무엇보다 주인공의 성장이 마지막 3막에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은 점도 아쉽다. 물론 몸 상태가 말이 아닌 상태였던 것은 알지. 휠체어 생활도 오래했으니 아무리 영화라 해도 갑자기 얘가 벌떡 일어나 저항하는 전개도 말이 안 되고. 그러나 지금의 전개에는 주인공의 성장이 너무 없다. 워싱턴 대학 병원의 플랜카드에 적혀있던 '한계를 넘어라'라는 문구를 우연히 한 번 보곤 발가락 하나로 저항. 그 자체로 나쁜 전개는 아니지만, 최소한 그 묘사는 더 들어갔어야 했다. 플랜카드 한 번 보고 발재간이라니, 최소한 마음 먹는 클로이의 표정 클로즈업은 좀 더 보여줬어야지.

그럼에도 에필로그의 결말은 존나 맘에 듦. 누가 뭐래도 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복수극을 좋아한다. 애초 그래서 타란티노 좋아하는 거고. 클로이가 다이앤에게 똑같이 갚아주고 있는 것 같아 내 딸도 아닌데 존나 대견했다. 그래, 다이앤. 너도 너 같은 딸 길러봐라. 

뱀발 - 사라 폴슨의 호러 장르적 연기 개쩔긴한데 요즘 너무 이런 연기만 해서 좀 걱정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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