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소 겁이 많아 호러 영화와는 담을 쌓고 지내지만, 그 담을 유독 내가 먼저 허무는 경우의 영화들이 있다. 바로 슬래셔 호러와 코미디의 조합이 바로 그것. 서로 많이 달라보이는 그 두 장르는 사실 꽤 잘 어울리는 조합의 장르다. 인간을 갈아버리는 신체 훼손 묘사들이 모럴 센스를 아득히 뛰어넘는 극단성을 띄게 되면 그 때부턴 그냥 고삐 풀린 것처럼 넋나간 느낌으로 웃길 수 있는 거거든. 애초 존나 진지한 슬래셔 영화로 시작했던 <프레디 vs 제이슨> 같은 영화들도 보다보면 풉-하고 웃게되는 장면이 꽤 많지 않나. 하여튼 난 이런 호러와 코미디의 조합을 은근히 좋아한다. 꼭 슬래셔가 아니더라도 <드래그 미 투 헬> 같은 거존나 낄낄대면서 봤었거든.
프리키 스포일러!
영화는 익숙한 바디 스위치물이다. 그러나 혁신적인 장르 영화들이 다 그렇듯, 뻔하고 익숙한 소재도 딱 하나 다른 무언가의 에센스를 첨가하면 그 맛이 확 달라지는 법. <프리키 데스데이>가 선택한 건 살인마와 피해자의 몸이 바뀐다는 설정으로 그 익숙함을 타개하려 한다. 이 설정은 진짜 존나 좋다. 콜롬버스의 달걀 같은, 어찌보면 별 것 아닌 간단한 아이디어지만 이걸 생각해내고 실행에 옮겼다는 게 중요한 거다. '제이슨 부히스' 컨셉의 육체파 살인마와 소심하고 또 소심한 어린 소녀의 바디 스위치. 여기에 빈스 본의 여고생 연기까지. 이건 존나 재미 없을 수가 없는 거잖아.
문제는 영화가 너무 무난하기만 하다는 것이다. 엔터테이닝한 설정에 비해 영화가 자꾸 안전한 길로만, 검증되고 뻔한 길로만 가려고 한다. 신선한 설정 갖다 써놓고 왜 익숙한 전개만 쓰는 거냐고. 꼭 할 수 밖에 없는 부분이었겠지만 남성 살인마의 몸으로 들어간 여고생이 화장실에서 겪는 일들이라든가, 그 바뀐 몸으로 자기를 괴롭혔던 사람들 찾아가 조지는 전개라든가. 뭐, 여기까지는 바디 스위치물에서 필연적으로 꼭 나올 수 밖에 없는 클리셰 기본 요금 같은 것이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머지 전개들마저 몽땅 뻔한 것이 심각한 문제라는 거다. "난 게이고 넌 흑인이니 우린 다 죽었어!"라는 대사를 치며 도망가는 주인공의 친구 무리들. 이 대사로 말미암아 영화가 메타무비적 설정을 가지고 들어오려는 건가 싶었다. 기존 호러 영화들의 클리셰를 노골적으로 가져와 비틀며 코미디의 도구로써 사용할 것 같았다. 근데 그런 묘사도 별로 없다. 기존 호러 영화들의 클리셰들을 그렇게 잘 알고 있으면서도 주인공 무리는 하나같이 멍청한 행동과 결정들만을 반복한다. 제아무리 어린 고등학생들이라 해도 그렇지...
코미디와 호러, 두 가지 장르를 접붙이는 건 잘 어울리고 쉬워보이지만 은근히 어렵다. 일단 둘 다 해내야하기 때문. 관객들에게 공포감도 심어줘야하고, 그러면서도 또 웃음을 줘야한다. 당연한 것 아닌가? 근데 <프리키 데스데이>는 그 부분에서도 실패한다. 호러 장면들은 영화의 코미디 분위기 때문에 묽어지고, 반대로 코미디 장면들은 호러 분위기 때문에 축 처진다. 웃어야하는 건지, 비명을 질러야하는 건지. 어느 장단에 맞춰야할지 모르겠다. 심지어 육체파 살인마가 여고생의 몸으로 들어감으로써 영화의 긴장감도 반감 되잖아. 어찌되었든 여고생의 몸이기에 기존 살인마가 해내던 액션들이 육체적으로 불가능한 부분들이 있고 그게 실제로 묘사된다. 그런데도 이 놈의 살인마가 하나부터 열까지 다 몸으로 쇼부 보려고 하니 긴장감이 생길쏘냐. 차라리 다른 방식으로 살인 했어야지. 여고생의 얼굴로 기만 전술을 더 적극적으로 쓴다든가.
마지막 에필로그는 존나 무리수 중의 무리수였다고 본다. 진짜 제이슨도 아니고, 경찰들한테 총을 몇 방이나 맞았는데 그걸 그렇게 살아돌아오냐? 겨우 이딴 결말 만들려고? 아즈텍 문명의 저주로 몸이 바뀐다는 가뜩이나 비현실적 전개 가진 영화인 거, 나도 알아. 그래도 그외 다른 부분들에서 만큼은 현실성을 담보해줬어야지.
빈스 본 연기는 존나 인정이다. 여고생처럼 춤추고 여고생처럼 남고생과 키스하는 장면. 웃겼다기 보다는 존나 귀엽고 찰졌다. 아, 몰라. 빈스 본은 언제나 내게 호감이라서...
나쁘고 재미없는 영화인 것은 아니다. 분명 볼만하고 시간 죽일만 하다. 그러나 높았던 기대에 비하면 제대로 즐기지는 못했다. 진짜 처음부터 끝까지 병맛으로 웃기고 재밌는 영화일 줄 알았는데. 더 극렬하게 할퀴고 날뛰었어야지.
덧글
로그온티어 2021/05/17 02:20 # 삭제 답글
매년 영화를 몇십개씩 챙겨보며 엥간한 장르 공식에 빠삭해서 엥간한 거에 질려버린 사람들은 이미 이걸 보며 "좀 더 미쳤어야지!"라고 외치겠지요. 근데 저는 제가 그 말을 외칠 때를 기억합니다. 제가, "좀 더 또라이같이 굴었어야지! 그렇지 않아?" 라고 물으며 옆 사람을 보았는데, 그 옆 사람이 광기에 번뜩이는 저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하는 걸 보았습니다. 깨달았습니다. 아, 모든 사람들이 나같진 않구나...
CINEKOON 2021/05/24 13:5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