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가 만든 지옥도. 재밌는 건, 그저 지옥 같은 상황을 쭉 나열하는 데에서 그치는 영화가 아니라는 거다. 단테가 지옥의 이 곳 저 곳을 관광?하며 그 풍광??과 문화???를 우리에게 전달했듯이, <지옥의 묵시록>은 주인공이자 관찰자인 '윌라드' 대위를 통해 베트남전의 푹푹찌는 광기의 지옥도를 우리에게 선보여낸다. 그러니까 어쩌면, 이것은 영화 역사상 가장 지독한 로드 무비일런지도 모른다. 아닌 게 아니라 진짜로 '커츠' 대령 찾으러 가는 과정이 이 영화의 전부이기도 하니까.
아, 이번 관람 포맷은 최근 극장에서 재개봉한 파이널컷 버전. 리덕스 버전으로 관람한 이후 거의 십여년 만의 재관람이었는데, 극장에서 보는 건 또 난생 처음이었네.
스포의 묵시록!
영화는 보기만해도 무더운 동남아의 열대우림을 멀리서 조망하는 쇼트로 시작된다. 이윽고 카메라는 우측으로 트래킹하고, 저멀리서 들려오던 프로펠러 소리는 점점 가까워짐에 따라 커지는 동시에 헬기의 실체를 프레임 안으로 끌어들인다. 숲 주위를 빙글뱅글 도는 헬리콥터 무리. 그리고 그 프로펠러 바람에 뿌옇게 이는 모래먼지. 여기에 모든 걸 불태워버리는 폭발음과 화염. 영화는 첫 쇼트를 이렇게 시작함으로써, 전쟁 당시의 베트남이 어떤 분위기였는지를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이어지는 건 PTSD에 반쯤 미쳐버린 윌라드 대위의 소개 시퀀스다. 이혼 도장으로 끝내 갈라선 본토의 아내를 떠올리기도 하다가, 하염없이 돌아가는 천장형 선풍기의 모습에서 전쟁터 한 가운데의 헬리콥터를 소환해내기도 하고, 여기에 감정의 발화점을 끌어내려주는 술까지 식도로 들이밀었으니 PTSD가 더 심각해졌으면 심각해졌지 도무지 나아질 수는 없는 거지. 그러니까 거울 깨먹으며 자해 비슷한 걸 하기도 하는 거고.
근데 이 소개 시퀀스가 굉장히 참신하고 완성도 있게 연출되어 있다. 직접 겪었던 전장의 시끄러운 참상과 한없이 고요하기만한 호텔 방의 이미지가 끊임없이 서로 디졸브 되며 엮이고 또 이어진다. 몰아치면서도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인물의 과거와 내면을 영화는 훌륭하게 담아내고 있고, 여기에 마틴 쉰의 훌륭한 연기가 있다. 참신한 포인트는, 보통의 영화들이 이야기 전체를 이끌어갈 주인공을 초반에서 소개할 적에 이렇게 노골적으로 끌어내린 적이 있었는가-하는 것. 제아무리 강조에 강조를 더하려고 해도, 어쨌거나 주인공을 첫 소개하는 시점에서는 대부분의 영화들이 자중하고 그 인물의 최대한 평범한 모습을 관객들에게 선사하려고 하지 않나. 아니면 아프고 상처난 과거가 있다 하더라도 보통은 숨기고 시작하지. 근데 이 영화는 그걸 그냥 다 보여주면서 시작해버린다. 이미 내면에서부터 무너진 인물로 영화가 시작하는 것이다.
또다시 단테 이야기. 단테가 지옥과 연옥, 천국을 여행하며 각각의 층과 영역으로 그 공간들을 겪어냈듯이 윌라드도 베트남전이라는 이 지옥을 총 다섯개의 단계로 목도하게 된다. 순서는 헬리콥터 부대 -> 위문 공연 -> 두 렁 다리 -> 프랑스인 농장 -> 커츠 월드. 그 중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아무래도 첫번째 단계였던 헬리콥터 부대 시퀀스일 것이다. 전쟁과 살인 등의 모든 행위들을 마냥 긍정적으로만, 또는 그에대해 아무 생각 없는 것으로만 묘사되는 '킬고어'의 광기. 그에게 전투의 승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핑 타기 좋은 파도를 찾아내는 일이며, 고로 베트콩을 비롯한 적들은 그저 자신의 취미 생활을 막는 장애물로 상정될 뿐이다. 심지어 포로나 전쟁 물자 같은 승리 끝에 얻어낸 노획물 보다도 더 중요시 여기는 게 서핑보드인 것 같음. 하여튼 킬고어 캐릭터가 워낙 강렬하고, 바그너의 음악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강습 장면의 인상이 너무 파워풀해서 어쩔 수 없게도 이 첫번째 단계가 영화의 가장 하이라이트처럼 느껴진다.
문제는 여기에서 생긴다. 물론 이 영화가 대작이고, 좋은 명작이라는 데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 좋다고만 말하니 개인적으로 느낀 아쉬움 같은 건 접어두라고 한다면 그건 또 그거대로 웃기잖아. 하여튼 내가 느낀 아쉬운 점. 상술했듯 총 다섯 단계로 구분할 수 있는 영화인데, 그 중 킬고어로 대표되는 첫번째 단계 시퀀스가 너무 강하다는 것. 그러다보니 이후 이어지는 단계들이 약간 손해를 보는 모양새다. 원래 강렬함이라는 게 갈수록 배가되어야 맞는 건데, 어째 이 영화는 데크레셴도로 연주되고 있는 느낌. 게다가 개인적으로는 최종장인 커츠의 왕국 시퀀스가 너무 약하게만 느껴지더라고. 광기로 가득찬 세상일 줄 알았는데 오히려 '임모탄 조' 같은 놈들보다 더 문명화되어 있는 느낌.
물론 안다. 영화가 표현해내려는 건 막되먹은 미친놈들의 세상이 아니라, 역사적 순행을 거스르는 역방향 단계의 세상들이었다는 것을. 베트남전에서부터 시작해 각 단계를 거치며 각각 식민지 시대와 원시 시대로의 회귀를 보여주려고 했다는 걸 안다. 그러나 장르 영화팬인 나로서는 어쩔 수 없게도, 영화가 장르적으로 줄 수 있었던 재미를 너무 대놓고 버린 것 같아 아쉬웠을 뿐. 커츠 대령은 두 시간 내내 윌라드의 내레이션을 통해 소개된다. 그리고 주인공이 그랬듯, 관객 역시 그에 대한 호기심을 켜켜이 쌓아가기만 한다. 게다가 배역은 또 말론 브란도잖나! 그럼 막판에 정말이지 오줌 지릴 만큼의 공포는 좀 줬어도 되잖아. 지금은 그 쌓아놓은 기대감과 긴장감에 비해 생각보다 너무 별 거 없었던 느낌.
허나 사실 이건 그냥 꼬투리 잡은 거고. 영화 자체는 명작인 게 맞다. 연출과 연기가 잘 조율되어 있는 영화고, 무엇보다 그런 걸 다 떠나서 한 눈에 보기에도 그냥 대작. 헬리콥터 여러대가 하늘을 가르는 모습, 군용 보트가 물살을 가르며 정글을 해쳐나가는 모습, 섬뜩한 분장을 하고 우로 좌로 도열한 원주민 엑스트라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당시의 코폴라가 대체 어느 정도의 권력을 갖고 있었던 것인지 체감하게 된다. 물론 그만큼 본인 머리는 과부하 걸렸겠지만.
오래된 영화이다 보니 극장에서 본 건 처음이었는데, 스크린의 크기와 스피커의 사운드 질에 대해서는 왈가왈부 못 하겠다. 그냥 이 작품을 극장에서 볼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진귀한 경험이었다. 어릴 때는 진짜 조그마한 모니터로 봤었는데. 그 작품이 이렇게 리마스터링도 되다니. 격세지감이란 정말이지 이런 것이다.
뱀발 - 처음 본 것도 아니었는데 이 영화에 로렌스 피시번 나오는 거 진짜 1도 모르고 있었음. 크레딧에 뜨길래 충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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