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리키 데스데이>와 마찬가지 전략의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이른바 콜럼버스의 달걀 같은 후킹을 무기로 삼은 영화인 거지. 과거 시점의 누군가와 현재 시점의 누군가가 편지 또는 전화 등의 매개체로 시공간을 뛰어넘는 소통을 하게 된다-라는 이야기 자체는 이제 익숙 하잖아. <시월애>부터 시작해 그걸 리메이크한 <레이크 하우스>도 있고, 드라마로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시그널>도 있지. 그러나 <콜>은, 여기에 한 가지 에센스를 더한다. 현재의 주인공과 연결된 과거의 인물이, 닿을 수 없어 아쉽기만한 멜로 드라마의 대상이거나 같은 목표 의식으로 무장한 시간을 초월한 동료가 아니라 싸이코패스 연쇄살인마였다는 설정. 그 단 하나. 얼핏 들으면 누구나 떠올릴 수 있었을 것 같은 이야기고 또 사소해보이는 설정이지만, 영화 속 '영숙'이 말했듯 이렇게 사소한 것 하나가 영화 전체를 바꿔놓을 수도 있는 것이다.
사소한 스포 하나가 감상을 바꾼다니까?
<빽 투 더 퓨쳐>가 그랬고, <사랑의 블랙홀>이 그랬으며, 최근에는 <어벤져스 - 엔드 게임>이 그랬듯. 시간 여행이라는 것은 현실에서 불가능하다. 때문에 제아무리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방법으로 설명하려 들어도 결국 현실에서는 그게 말이 될 리 없다. 고로, 시간 여행의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설정 따위는 영화 속에서 아무 의미 없는 것이다. 단 한 가지만 잘하면 된다. 영화가 스스로의 시간 여행 규칙을 정하는 것. 그리고 그 규칙을 충실히 따르는 것.
그 점에서 <콜>은 흥미롭다. 반은 성공하고, 반은 실패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일단 이 영화의 시간을 초월한 소통이 특이한 것은 두 개의 시간대가 서로 병렬적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90년대의 영숙과 현재의 '서연'은 분명 하나의 타임라인으로 직렬 구성되어 연결된다. 허나 이 영화의 규칙에 따르면 현재의 서연과 소통하고 있는 90년대의 영숙이 해당 시간대에서 특정 행위를 할 경우, 그것이 현재에 즉각적으로 반영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현재의 서연은 이미 연결된 상태인 영숙의 시간대보다 더 앞선 시간대에 연결될 수 없고, 그보다 더 뒤쳐진 시간대와도 소통할 수 없다. 영숙과 서연의 시간대가 평행하는 병렬 구조처럼 느껴지는 게 바로 이 때문이다.
이는 분명히 흥미롭지만, 각본을 지나치게 단순화 시키기도 한다. 일단 영숙과 서연의 시간대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타이밍이 너무나도 한결같이 드라마다. 현재 시점의 서연과 소통하게 된지 얼마 안 되어 과거 시점의 영숙은 해당 시점대에 존재하는 어린 서연을 만나게 된다. 이어서는 에상 가능한 스토리다. 과거 시점에서 곧 죽게되는 서연의 아버지를 영숙이 살려주는 것부터 시작해, 작은 밑그림들은 충분히 예측 가능하게 흘러간다. 왜 나오는 건가 싶었던 초반부 오정세의 캐릭터 역시 애초부터 죽기 위해 등장했던 인물로서 바스라지고, 영숙의 죽음을 알게되는 현재 시점의 서연과 실제 벌어졌던 그 과거 속 영숙의 죽음이 얽히는 타이밍 역시 너무 귀신같다. 이 정도면 그냥 신이 총애하는 영숙을 싸이코패스 살인마로 길러내기 위해 일부러 그 타이밍의 서연과 폰팅을 주선해준 게 아닌가 싶어질 정도.
여기에 에필로그의 문제가 있다. 그 자체로는 맘에 드는 엔딩이라고 생각한다. 에필로그 직전까지 보여주고 영화가 끝났다면, 또 뻔한 한국의 가족 드라마로써 기억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장르적인 선택을 했고, 비극적이면서 기분 나쁜 배드 엔딩을 선사함으로써 여러 의미로 관객들 뇌리에 각인되었다. 그리고 난 그게 마음에 든다. 에필로그 덕분에 영화가 감상 직후 한 이틀까지도 머릿속에서 떠나가지 않더라. 이건 큰 장점이다. 물론 다른 관객층의 불호 역시 이해 안 되는 게 아니지만. 하여튼 결말 자체는 좋다 이거다. 그러나 그 결말을 선사하기 위해 심어둔 복선과, 그 결말을 선사하기 위해 깨뜨린 영화 내 규칙이 심히 신경 쓰일 수 밖에 없었다. 이거야말로 이 영화의 병렬적 시간 여행 규칙을 더 잘 설명해냈어야 하는 이유였던 거지. 근데 영화는 여기서 갑자기 혼자 내달려버린다. 이해 됐든 안 됐든, 이게 말이 되든 안 되든 다 떠나서 영화가 그냥 결말만을 쫓아 놓아버린 느낌이다. 설명이 부족한거든, 논리가 부족한거든 뭐든.
그러나! 그 정도를 제외하면 영화의 나머지가 대부분 다 좋다. 초반에는 감독의 연출이 너무 직접적이고 과한 것 아닌가-라는 의심이 있었는데 전개되면서 점차 나아지더라. 후반부 집을 가득채운 냉장고 떼씬으로 그 순간의 맥락을 납득시킬 땐 소름이 돋았다. 무당으로 설정된 이엘의 캐릭터가 너무 얇고 급 퇴장한 것 같다는 인상도 있었지만, 이 이상 길어졌다면 영숙과 서연의 대결 구도가 손해를 봤을 것 같기도 하다. 여기에 역사개변의 순간마다 바뀌어가는 세트의 프로덕션 디자인과 그를 뒷받침하는 CGI 등도 훌륭하다.
그리고... 전종서가 있다. 물론 박신혜와 김성령, 이엘, 박호산 등의 나머지 배우들도 괜찮다. 허나 그들이 꽤 괜찮은,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주고 있는 반면 전종서는 그냥 영화를 휘어잡는다. 90년대와 현재 시점을 가로 지르며 혼자 영화를 쥐고 흔든다. 올해 본 영화들 중 <언컷 젬스>의 아담 샌들러 이후, 한 명의 배우가 이토록 팽팽한 장력을 만들었던 경우가 또 있었나-를 되짚게 되었다. 찰진 욕설과 섬뜩한 표정 연기 그 자체로도 무섭지만 살짝 지나가는 실루엣과 뒷모습, 불현듯 튀어나와 카메라를 향하는 눈 흘김 등으로 더 공포를 자아낸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영화는 정말 전종서 없었으면 그 파괴력이 반도 못했을 영화인 것이다.
규칙이 희미하고, 각본적으로도 아쉽지만 장르적으로 치고나가는 맛이 있는 영화였다. 그리고, 모든 시간 여행들이 다뤘던 바로 그 메시지. 우리는 언제나 과거에 저당잡혀 있다. 과거에선 현재를 바꿀 수 있지만, 현재에서 과거를 바꿀 수는 없다. 인과의 역행은 불가능하다는 진리. 물은 언제나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것과 같은 맥락. 그러니까 우리는 언제나 현재에 충실해야한다. 너무 교훈적인 마무리인가? 그러나 그게 사실인 걸 어떡해. 칼자루를 쥔 쪽은 항상 과거라는 말, 그건 미래에 대한 칼자루를 현재의 우리가 쥐고 있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고로 매 순간 집중해 잘 살아야한다고. 뜬금없지만 <콜>을 보며 그걸 또 한 번 느꼈다. 백 날 머리 쓰면 뭐하냐고, 과거의 네가 거기 붙잡혀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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