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시무시했던 과거를 숨긴채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던 주인공이, 딸이 납치 되면서 왕년의 실력을 꺼내어 모두를 도륙하기에 이른다는 영화. 나도 안다. 이제 이런 내용의 영화들로도 팔만대장경 쓸 수 있을 정도라는 거. <테이큰>과 <아저씨> 플롯이라는 거. 아니, 그 두 편만 언급했지 실상 따지고 보면 이런 종류의 영화들 정말 많을 거야. '강철중' 말마따나 앉아번호로 연병장 두바퀴도 채울 수 있을 거라고. 다만 <검객>이 가진 강점은, 영화의 시간적 배경이 조선시대라는 점에 있다. 뻔한 장르적 클리셰도 시대극과 만나면 플러스 알파되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 물론 연출은 잘해야지 바로 그 점에서 <검객>은 메리트를 갖는다.
앞서 말했듯 이야기는 존나 뻔하다. 죽음으로 가는 길을 담담하게 걷고 있던 재야의 숨은 고수가 납치당한 딸을 찾아 나서기 시작하면서부터, 영화는 결말의 아주 디테일한 부분들까지도 다 까고 시작한 거지. 딸이 납치 되었을 때 그 정보를 주인공에게 전달해줄 수 있는 뻔한 조력자 캐릭터로 동네 주모가 설정되어 있고, 악당들 중 잔챙이들은 표정부터가 비열하기 그지 없으며, 그 세력의 두목이라고 할 수 있는 메인 악역은 또 힘과 무술 그 자체에 경도되어 있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마치 <아저씨>의 '람로완'이 그랬던 것처럼. 듣기만 해도 이 모든 것들이 다 뻔하지 않은가. 여기에 심지어 주인공은 시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건 또 뭐야... <자토이치>가 씨앗을 뿌리고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에서 황정민이 기깔나게 보여줬던 바로 그것을 다시 한 번 리바이벌 하겠다는 거잖아...
그러나 정말로 매번 말하지만! 장르 영화에서 이야기가 뻔한 것 정도는 눈 감아 줄 수 있다. 애초 장르 영화라는 게 그 장르적 쾌감 하나만을 위해 달려가는 영화들 아닌가. 그럼 장르적 쾌감만 잘 준다면야 이야기가 좀 뻔하더라도 상관없지. 심지어 때떄로는 그 뻔한 장르적 클리셰들이 해당 장르의 매력을 되새기게끔 해주는 요소로써 작용하기도 하는 거고. 때문에 이야기가 뻔한 것 자체는 상관없다. 그냥 우당탕탕 빠르게만 전력질주해 지루하지만 않게 해준다면 그걸로 된거지.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영화가 힘을 갖는다. 다 필요없고 액션 장르 영화잖아. 그럼 액션이 제일 중요한 건데, 그 액션을 기본기 이상 잘 해냈다. 이미 여러 사극들에서 질리도록 봤던 검술 액션이지만, 타이틀 롤을 맡은 장혁 덕분인지 묘하게 절권도의 향이 풍긴다. 테크니컬하면서도 절도 있는 칼싸움이라고 할까. 다소 과하지만 그 액션들을 잘 붙잡아주는 몇몇 촬영 순간들도 좋고, 무엇보다 장혁의 액션 연기가 근사하다. 아니, 진짜로 간지난다. 어째 장혁은 점점 왕년의 실베스타 스탤론 같은 느낌의 배우가 되어 가는 것 같네. 일반적인 연기 자체는 무난한데 액션 스턴트의 질이 좋은 그런 배우. 진짜 액션 배우 같은 느낌이 있다.
검을 쓰는 영화임에도 인물들이 많이 구르고, 관절기까지 쓰는 묘사가 많다. 확실히 검을 활용한 액션 하나만큼은 제대로 해보겠다는 패기 같은 게 보인다. 여기에 이 영화는 일본의 사무라이 영화들, 특히 찬바라 영화들의 매력을 양념으로 고루 뿌린다. 사실 '시스템이 반쯤 붕괴해 자력구제만 가능한 시대 상황 속에서, 들이닥친 외부인 악당들을 혼쭐내는 구원자'라는 이야기 설정부터가 일본의 사무라이 영화나 그로부터 영향받은 미국의 서부영화들과 그 궤를 같이 하는 거지. 그냥 칼로 챙챙하고 싸우니까 그거 하나만으로 찬바라 영화 같다는 말을 하기는 좀 그래.
여기에 <닌자 어쌔신> 같은 영화들에서 많이 봤던 와패니즈 닌자 집단들도 나옴. 사실 설정이 좀 애매하긴 하다. 의상이나 하는 짓은 영락없는 닌자인데 국적은 청나라. 영화 만든 곳은 한국. 기묘한 문화 통일인데, 현실 고증적으로 말이 되냐 안 되냐를 떠나서 바로 이런 점들 때문에 이 영화가 옛날 비디오 대여점 바이브의 B급 액션 영화 같아 보인다. 그리고 그래서 그게 난 좋았다. 그런 영화 있잖아. 다들 "난 이런 영화 안 좋아해"라고 말하면서도 비디오 대여점 가면 항상 그 케이스가 비어 거꾸로 꽂혀있는. 왠지 모르게 그런 느낌이 드는 영화라 좀 정이 가더라고.
그럼에도 아쉬운 부분들이 더 많다. 일단 이야기 설정. 분명 아까는 이야기가 뻔한 거 눈 감아 줄 수 있다고 하지 않았냐고? 물론이다. 그러나 할 거면 더 단순했어야 한다고 본다. 일단 이렇게 큰 이야기일 필요가 있었나? 그냥 왕년의 고수가 내 딸 찾아 삼만리 찍으며 다 도륙하는 내용 정도에서 그쳤더라면 더 많은 액션을 넣을 수 있었을 것이다. 허나 영화는 명과 청 사이에서 갈등하는 조선의 상황, 혼란스러운 민초들의 삶, 내로남불 태도를 보이는 양반들 등 당시의 국제적인 사안들까지 품속으로 끌어당긴다. 근데 그걸 잘했으면 몰라. 어차피 예산이 큰 영화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백날 명청 사이에서 갈등하는 왕과 신하들 모습 보여줘봤자 거기서 끝이잖나. 기껏 그렇게 분위기 깔아주고 등장하는 청나라 악당들도 다 시정잡배 수준에서 머물고 마는데 뭘 굳이 그렇게...
마지막으로 배우들 문제가 있다. 장혁은 좋은 액션 배우지만, 그 자체로 매너리즘에 빠진 듯한 드라마 연기를 보여준다. 문제는, 그런 장혁이 이 영화에서 가장 연기를 잘 하는 사람이라는 데에 있다. 아, 정만식과 장현성 정도는 괜찮다. 둘 다 출연 분량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니까. 그러나 나머지 조단역들은 죄다 문제다. 일단 <레이드>의 안습경찰 조 타슬림이 나오는데, 이미지도 은근히 안 어울리고 무엇보다 대사 연기가 깬다. 내가 봤을 땐 이거 다 후시녹음 한 것 같은데... 그 ADR 상태가 진짜 형편없다. 보는내내 더빙이라는 게 노골적으로 보이는 느낌. 더불어 잠깐 나오는 대장장이 캐릭터의 배우나 청나라 악당들을 담당한 배우들도 연기가 붕 떠 있다. 여기에 뜬금없이 등장해 뜬금없는 캐릭터성을 보여주는 '화선' 역시도 그 연기에 보는 내가 힘이 빠진다. 아니, 무엇보다 진짜 화선과 그 호위무사는 왜 나온 거야? 하는 것도 없는데 쓸데없이. 무술 아이디어는 좋은데, 몇몇 배우들의 액션 연기가 그것도 까내린다. 화선을 연기한 이나경의 액션 연기는 너무 그 텀이 보여서 슬프고...
분명 더 재밌을 수 있는 영화였다. 액션 영화로써 액션에 꽤 강점을 보여주고 있으니까. 그러나 몸짓만 그럭저럭이면 뭘해, 눈짓이 어영부영인 것을. 액션 다찌마리 하나 짤 시간에 배우들 연기 톤만 좀 더 조절해줬더라면 적어도 지금과 같은 결과는 없었을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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