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15 21:49

DA 5 블러드 극장전 (신작)


스파이크 리는, 물론 그 시작부터 다분히 정치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 감독이다. 흑인, 그러니까 아프리칸 아메리칸으로서의 본인 정체성으로부터 그의 필모그래피가 시작 되었으니까. 그러나 중간에 <25시>나 <인사이드 맨>, 그리고 미국판 <올드보이> 같은 작품들을 연출하면서는 본인의 그러한 타고난 정체성을 피력하는 데에서 한 발 물러난 것처럼 보였다. 그랬던 그를 전작 <블랙 클랜스 맨>을 통해 다시금 본래의 맥락으로 돌아오게 한 데에는 아무래도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이 컸겠지. 인종적, 종교적, 성적, 국가적 분열 등을 야기하며 실제로 국경 사이에 담을 쌓자고 논하던 자가 백악관 집무실을 차지 했을 때, 스파이크 리는 과거 KKK단의 망령을 다시금 소환하는 방식으로 그에 대응했다. 그리고 이번 영화 <DA 5 블러드> 역시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트럼프 대통령의 실제 영상을 가져오는 것으로 시작해, 올해 초를 뜨겁고 검게 달구었던 'Black lives matter' 운동으로 끝을 맺는다. 이쯤 되면 감독의 연출적 귀소본능이라고 해야하는 것일까.

아프리칸 아메리칸으로서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과거의 용사들. 그러나 그 과거에서 끝내 돌아오지 못했던 단 한 사람, '노먼'. 영화는 정글 어딘가에 묻혀있을 전우의 시체를 찾기 위해 다시금 베트남으로 돌아온 왕년의 노장들을 보여준다. 그러나 딱 그 이유 하나뿐이었다면 그저 고귀하고 말았을 것인데, 이들이 노리는 게 딱 그거 하나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전쟁 당시 훔쳐 그들이 어딘가에 묻어두었던 전쟁 물자, 금괴. 어찌되었든, 전우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현재 내 인생의 고달픔 그 두 가지를 한 큐에 해결할 수 있는 티켓이 바로 이 베트남행 비행기 티켓이었으니 그 누구라도 마다할 이유 없었겠지.

짐짓 영화는 뻔해 보인다. 오프닝부터 그렇다. 아프리칸 아메리칸으로서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는 주인공들의 모습과, 나라를 위해 싸웠음에도 끝까지 차별 받았던 그들의 현재 상황을 초장부터 대두시켜버리니까.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아, 이거 또 스파이크 리가 흑인 차별하는 미국 사회를 비판하기 위해 만든 영화구나" 근데 어째 영화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그러한 예상을 빗겨간다. 다름이 아니라 이건 그냥 모두까기 영화처럼 보이는 거지.

흑인을 멸시하는 사회와 국가의 태도에 대한 비판이 물론 있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다. 보다보면 다 깐다. 베트남 전쟁이라는 부도덕한 전쟁을 저질렀던 당시 미국에 대한 비판도 역시 있다. 근데 또 그게 끝이 아니야. 세부적으로는 베트남 사람들도 깐다. 캐릭터적 다양성이라고 하면 할 말 없지만, 하여튼 등장하는 몇몇 베트남인들이 진짜 치졸하고 얄밉게 묘사된다. 대부분이 악당이고, 꼭 악당 아니더라도 중간 수상시장에서 생닭 강매하던 그 베트남인도 진짜 짜증나더라. 여기에 두세명 등장하는 프랑스인들도 까는 건 마찬가지다. 약속 안 지키면서 뒷통수 때리고, 도덕적 우월감에 빠져있는 듯한 묘사도 종종 있다. 근데 진짜 웃긴 건, 심지어 흑인들도 까는 것처럼 보인다는 거다. '깜둥이'라는 표현에는 학을 떼면서, 정작 그들은 아시아인들을 '노랑이'로 지칭한다. 후반부로 가면 갈수록 관객들을 불안하게 하고 열 받게 만드는 것 역시 베트남 악당들이 아니라 흑인 주인공이다. 이쯤되면 모두까기 영화 맞다.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근현대 역사는 너무나도 꼬여있다. 미국은 뻘짓한데다 심지어 졌으며, 베트남은 공산국가이고 프랑스를 비롯해 많은 유럽 국가들이 식민지 경영에 힘썼다. 흑인 인권은 여전히 좋지 않지만, 따지고 보면 동양인들의 처우가 흑인들 보다 못하면 더 못했지 낫지는 않다. 그런 상황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스파이크 리 영화에서 이런 식으로 풀어낸다. 물론 역사를 잊으면 안 되지. 그러나 굳이 따지고들면 다들 잘한 것은 하나도 없지 않나? 그래서 이 영화의 결말은 유치하다면 유치하지만 결국 화합이다. '오티스'는 끝내 자신의 딸을 만나는 것으로 영화가 이야기를 마무리 짓지 않나. 물론 오해의 소지를 만들고 싶지는 않다. 과거는 당연히 중요하고,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결국 중요한 건 현재고 미래라는 말. 그걸 위해 정리할 건 정리하고 어서 나아가야하지 않겠냐는 말. 그 말을 스파이크 리 입으로 들을 줄이야. 이 사람도 그새 뭔가 한 뼘 더 자란 것만 같다. 누가 누굴 평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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