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18 12:36

조제 극장전 (신작)


원작이 되는 이누도 잇신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굉장히 좋아한다. 어린 시절 내 감수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작품이었고, 무엇보다 그런 걸 떠나서도 영화 자체의 완성도가 뛰어나지 않았나. 때문에 이번 리메이크를 기대 반, 걱정 반의 마음으로 기다렸었다. 근데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지. 그럼에도 원작과의 비교는 최대한 피하며 이야기해보겠다. 리메이크판이 원본과 꼭 똑같이 진행되어야 한다는 원작 제일주의 같은 마인드는 없으니까. 

딱 잘라 말해 사랑의 시작과 그 끝을 함께 다루는 멜로 드라마로써 형편없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영화의 런닝타임이 거의 두 시간인데, 두 주인공이 제대로된 첫 키스를 하고 연애를 시작하는 것이 영화 시작하고 대략 1시간 20여분 지난 지점이다. 그럼 단순 계산으로 남는 건 40분. 그 40분 안에 두 남녀의 애틋하면서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와 더불어, 가슴 아프기만한 이별 이야기까지 다 담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사랑이든 우정이든, 관계의 변화를 그리는 영화들에서는 필연적으로 물리적인 시간 안배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좋았던 관계가 돌아서는 것, 나빴던 관계가 회복되는 것 등 180도 변하는 관계를 표현해내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물리적인 런닝타임이 담보되어야 한다. 뜬금없지만 그래서 <시스의 복수>가 아쉬웠던 거거든. 우량주 제다이가 우주 대마왕으로 돌아서는 데에 밑밥을 많이 깔았다해도 딱 한 씬 밖에 안 걸려버리니까 좀 덜 와닿는 느낌이었잖아. <조제>가 딱 그렇다. 첫키스한 두 남녀가 이제서야 공식적인 연인 관계로 발전했는데, 단 몇 씬 만에 이별을 맞는다. 심지어 연애의 시작에서 끝까지의 씬들 중 둘의 꽁냥꽁냥한 모습을 보여주는 씬이 별로 없다. 기억나는 건 둘이 난로 켜고 함께 누워있는 씬 딱 두 개 뿐.

원작 비교 안 한다고 했는데, 이거 딱 하나는 해야겠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도 긴 이별을 보여주는 영화였던 것은 맞다. 그러나 그 영화엔 이별 여행이 되고마는 바다 여행이 존재했다. 바다 여행 자체가 하나의 데이트 아닌 데이트로써 존재했다. 그 자체로 아름답기도 했지만, 이별의 맥락이 그 아래 깔려있어서 슬프기도 했다. <조제>는 어떠한가? <조제>는 바다 여행 대신 스코틀랜드 여행을 택했다. 뜬금없지만 그럴 수 있다. 예쁘고 이국적인 풍광 보여줘서 나쁠 건 없지. 그러나 문제는, 그 스코틀랜드 여행이 그저 '조제'의 상상이었다는 데에 있다. 조제와 '영석'은 함께 스코틀랜드에 가지 않은 것이다. 예쁘게 촬영되어 있지만, 그 모든 게 결국 허상일 뿐이었다는 것. 바로 그 점이 이 영화의 후반부를 맥 빠지게 만든다.

제일 짜증나는 건 '무조건 예쁜 샷을 찍어내자'는 마음가짐으로 촬영된 쓸데없는 쇼트들이 굉장히 많다는 것이다. 물론 예쁜 화면 좋지. 근데 영화에선 일단 이야기가 먼저인 거잖나. 지금 버전의 영화는 무조건 예쁜 샷을 먼저 찍어내는 게 제 1 목표인 영화처럼 보여 싫다. 소위 그 예쁜 샷들 중 필요없는 샷들이 굉장히 많다. 조제와 영석이 탄 대관람차를 굳이 바닥에 고인 물 웅덩이를 통해 촬영할 이유가 있었나? 별다른 의미도 없이 지나가는 행인이 그 물 웅덩이를 밟기도 한다. 이거 왜 넣은 건데? 스코틀랜드 길거리는 왜 그렇게 많이 찍은 거야? 주인공 둘이 스코틀랜드 간 적도 없었던 거잖아. 그냥 동네와 길거리가 예뻐서? 

마지막 아쿠아리움에서의 이별 장면도 형편없다. 아쿠아리움 PPL이었는지는 모르겠는데 굳이 여기서 이별할 필요가 있었나? 원작의 '물고기'란 요소를 어떻게든 집어넣기 위해? 그러나 갇혀 사는 조제를 상징했던 원작의 물고기는, 리메이크판에 이르러 그저 예쁜 소품 정도로 전락하고 만다. 심지어 그 물고기들이 갇혀있단 느낌도 잘 안 든다. 굉장히 넓은 수족관에서 많은 친구들과 함께 살고 있던데. 이처럼 이야기에 하등 도움도 주지 못하는, 그저 쓸데없이 예쁠 뿐인 샷들의 연속. 영화가 그냥 영상 화보집으로써의 총력전을 펼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말도 진짜 거지 같네. 리메이크 버전의 조제는 결말에 이르러서도 끝까지 홀로 서지 못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장애인용 자동차를 타고 직접 운전하긴 하지만, 운전석까지 오르는 데에는 남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아니, 그리고 휠체어도 아니고 애초에 자동차로 설정한 이유가 뭐야? 암만 봐도 자동차 PPL처럼 느껴지던데.

원작과의 비교를 떠나서도 그냥 못 만든 영화다. 쓸데없이 예쁘기만 하고, 한 시간 반 내내 썸만 타다가 비로소 연애하는가 싶더니 20분 만에 이별 -> 슬픔 -> 후회 다 하는 영화. 이런 영화로 만들 거였다면 왜 굳이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어야만 했을까. 나 이거 진짜 좋아하는 영화였는데 너무 아깝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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