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19 18:36

창살 속의 혈투, 2017 대여점 (구작)


이토록 이상하게 쿨한 영화는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감옥을 배경으로 하는 액션 영화이니, 어느 정도 떠오르는 그림들이 있다. 영화 역시 그 그림에 충실 하고자 이야기는 간소화 해놨다. 왕년에 복서였던 주인공이 마약 운반책으로 일하다가 감옥에 가게 되고, 임신한 자신의 아내가 위험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안에서 혈투를 벌인다는 이야기. 내용은 진짜 뻔하고 전형적이지 않나.

특이한 건 페이스가 엄청나게 느리다는 점. 두 시간 좀 넘는 영화인데 주인공이 감옥에 들어가기까지 40분이 넘게 걸린다. 내용도 신선하기는 커녕 뻔한데, 그걸 이점으로 삼아 진행을 빠르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을 영화는 그리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보통 이런 종류의 영화라면 인물을 간략히 소개한채 상황으로 바로 돌진할 텐데, <창살 속의 혈투>는 의외로 인물 소개에 긴 시간 공을 들인다.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지, 그가 원하는 종류의 꿈은 무엇인지, 지금 그에게 소중한 사람은 누구인지. 그 모든 걸 설명하는 데에 차근차근 접근한다. 어떻게 보면 쓸데없어 보이는 바람난 아내 자동차 맨손으로 부숴버리는 장면 같은 게 유독 긴 건 다 그 때문이다. 사실 내용 전개에 있어 꼭 필요한 장면은 아니지 않나. 하지만 영화는 이 주인공이 어떤 인간인지를 보여주기 위해 이토록 열과 성을 다한다.

액션에서 중요한 건 의외로 감정이다. 화려한 무술 디자인과 스펙터클한 CGI 및 특수효과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그럼에도 매 주먹질마다 각인되어야 하는 것은 인물들의 관계와 그에 따른 감정인 것이다. 그거 없이 손놀림만 화려하면 그게 그냥 포르노지. 마이클 베이가 일련의 로봇 병정 놀이를 통해 그 예를 제대로 보여주지 않았나. 바로 그 점에서 <창살 속의 혈투>는 쫀쫀하다. 주인공을 소개하는 데에 오랜 공을 들인 만큼, 관객들은 이 인물을 받아들이고 또 응원하게 된다. 게다가 이 영화는 주인공이 범죄자가 되어 교도소로 들어가는 영화이지 않나. 그 순간부터 관객들은 다 안타까워하기 시작한다는 거지. 

근데 주인공 이 양반은 관객들의 그런 동정심 따위가 전혀 필요없는 인물이었다는 게 반전. 진짜 싸움 존나 잘한다. 평소의 빈스 본 이미지 때문에 제아무리 주인공이라해도 좀 쩔쩔매는 감이 있을 줄 알았는데, 여기에서의 그는 거의 '캡틴 아메리카'없는 영화의 캡틴 아메리카다. 그렇게 날래고 민첩한 느낌이 없는데도 주먹 한 방 한 방이 묵직하게 느껴지는 그런 액션. 그래서 마약상의 똘마니들이나 악덕 간수들을 상대할 때에도 다 그저 때려눕히기마나 할 뿐. 전기 충격이나 진압용 곤봉 따위가 이 정도로 무소용인 인간이 있다니. 진짜 보면 볼수록 싸움 존나 잘해.

액션에 실린 감정도 안정적인데, 그 액션의 묘사들도 훌륭하다. 앞서 말했듯 스피디함보다는 묵직한 한 방에 꽂히는 액션인데, 좀 느리지만 확실히 보는 맛이 있다. 오히려 속이는 느낌이 덜해서 더 진득하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감독이 감독인지라 확실히 폭력 묘사가 좀 세. 팔 꺾어 부러뜨리는 건 예사고 얼굴을 바닥에 그냥 갈아버리는 묘사도 나온다. 가끔 특수 분장 티가 나기도 하지만 이런 종류의 영화에선 그것도 또다른 재미다.

진도가 느린데 타격감 하나만은 확실. 여기에 결말도 밑도 끝도 없는 하드보일드. 요즘 유행하는 액션 영화들이 아웃복서 스타일이라면 <창살 속의 혈투>는 인파이터, 그것도 헤드헌터 느낌에 가까운 영화다. 하여튼 기대 안 하고 봤는데 진짜 재밌게 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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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ID U MISS ME ? : 세버그 2021-11-14 16:00:51 #

    ... 속이 다 비치는 의상을 입혔어야 합니까? 그러면 영화가 내세우고 있는 주제랑 완전히 반대로 가는 거잖아요. 짧은 머리의 크리스틴 스튜어트는 매력 넘치고, 요즘들어 깡다구 있는 역할로만 만나고 있는 빈스 본 역시 반갑다. 그러나 딱 그 뿐. 영화가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 건지 모르겠음. 이건 진 세버그가 불쌍하다 ...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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