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21 17:17

맹크 극장전 (신작)


<시민 케인>의 각본가인 '허먼 맹키비츠'를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 근데 난 <시민 케인>의 야사를 전달하는 영화로써 기대했던 것이 아니라, 오랜만에 장편 영화로 돌아온 데이비드 핀처의 작품으로써 기대했던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결국 영화의 절대적 완성도와는 별개로 그닥 와닿지도 재밌지도 않더라.

<셰익스피어 인 러브>나 <톨킨>, 최근 작품 중에선 <소리꾼>과 그 궤를 같이 하는 영화다. 그 영화들처럼 <맹크> 역시 자신의 인생 경험을 통해 작품을 완성하는 예술가의 이야기인 것이다. 때문에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실재하는 작품인 <시민 케인>의 관람 여부에 따라 그 재미가 오락가락 할 수도 있다. <시민 케인> 속 언론인, 정치인, 갑부들을 모두 돌아가며 까던 뉘앙스가 모두 맹크의 경험에 크게 기인하고 있다는 설정이니 이런 걸 알려면 <시민 케인>을 보는 것 밖에 답이 없지.

핵심은 교차 편집이다. 간호를 받으며 <시민 케인> 각본을 써내려가는 맹크의 현재 시점과, 그 각본에 영향을 줬던 경험들이 담겨있는 과거의 시점들이 타이핑 자막을 필두로 왔다 갔다 오간다. 문제는 이게 겁나게 헷갈린다는 것이다. 보통의 영화라면 관객들에게 인물을 먼저 설명하고, 상황을 납득 시킨 뒤 그 상황에 이 인물을 몰아넣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킬 것이다. 그러나 <맹크>는 불친절하기 짝이 없다. 아니, 좀 더 고급스럽게 표현하자면 진입 장벽이 무지하게 높다. <시민 케인>을 관람하는 것은 물론이고 1930년대 당시의 미국 사회와 할리우드 분위기를 어느 정도 알아야 그나마 수월하게 따라갈 수 있는 영화인 것이다. RKO나 당시 MGM의 내부 사정, 데이비드 O 셀즈닉 같은 유명 영화인들 등이 마구 쏟아지는데, 이에 대해 어느 정도 사전 지식이 있다해도 이야기의 흐름이 워낙 빠른데다 교차 편집까지 냅다 부어버리니 처음 보는 입장에선 당황할 수 밖에 없는 것.

우리가 잘 모르는 시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도 좋고, 여러 인물들을 난립 시키는 것도 다 좋다 이거다. 그러나 그 복잡한 요소들을 최대한 단순하고 깔끔하게 정리해서 관객들에게 배송하는 것이 유통업자로서 감독의 의무다. 개인적으로는 <맹크>가 그 부분에서 실패했다고 본다. 그리고 이건 한국 관객들만 느끼는 문제일 수도 있는데, 넷플릭스의 자막이 워낙 정신 사납게 느껴진다. 그 자체로 오역이나 의역이 지나치게 많다는 말은 아니고, '미리엄'이나 '메리언', '메이어' 같은 이름 비슷한 인물들이 야바위하듯 마구 등장하는데 이걸 자막으로 좀 더 잡아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 정도?

주제는 예술가로서 타협의 최전방은 어디인가-다. 맹크의 조언 아닌 조언에 MGM은 프로파간다 영화를 만들어 선거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감독 입봉을 꿈꾸던 '셸리'는 본인이 영화가 아니라 선전물을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자살한다. 맹크는 자신이 겪었던 일들과 사람들을 참고해 허구의 이야기를 만들어내지만, 그 '참고 당한 인물들'의 입장에서는 <시민 케인>의 이야기가 마냥 허구로 느껴지지 만은 않는다. 그러니까 <맹크>는 영화를 포함한 예술이 일종의 칼로 변모할 수도 있음을 논하는 영화다. 그리고 그 칼을 어떻게 쓸 것인지, 타의와 그 압력에 의해 자신이 원하지도 않는 타이밍에 칼자루를 쥘 것인지. <맹크>는 그걸 이야기한다. 그러면서도 말하지. 사실 영화란 다 그런 것이면서도, 그럼에도 그래서 또 아름답기도 하다고. 정치적인 작업이고 모두의 작업이라는 점에 영화의 마법이 깃들어 있다고. <에이리언3>로 제작사와의 호된 갈등에 빠졌었던 핀처의 입장에서는 꼭 하고 싶었던 말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게리 올드만을 위시한 배우들의 연기도 물론 좋고, 디지털 필름 메이커인 핀처가 필름 룩으로 개조해낸 테크닉적 부분들도 분명 흥미롭다. 그러니까 영화는 잘 만든 영화라고.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랑은 맞지 않았다. 좋은 영화인 건 알겠는데, 이 영화를 사랑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헤일, 시저!>를 통해 코엔 형제가 그랬고,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를 통해 타란티노가 그랬듯이 핀처는 <맹크>를 통해 과거 할리우드 영화들에 대한 헌사를 바친다. 허나 그게 나랑 안 맞았다고. 핀처한테 기대하는 건 그런 헌사가 아니라, 내 심장을 쥐고 쫄깃하게 흔들어대는 장르 영화라고. 내 기대 포인트와는 너무 다른 영화였기 때문에 이렇게 불호 의사를 표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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