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31 15:39

2020년 영화 결산 줄세우기

2020년에 한국에서 공개 되었던 영화들 중 나의 개인적 TOP 10과 WORST 5. 
극장 개봉작 뿐만 아니라 제작과 공개 시점이 2020년인 넷플릭스 공개작들도 포함한다. (2020. 01. 01 ~ 2020. 12. 31)
전대미문의 전세계적 재난이 닥쳤던 올해. 개봉일이 미뤄지거나 취소된 영화들이 많아 상대적으로 영화를 많이 보지 못했다.
때문에 보통의 해였다면 순위 안에 들지 못했을 영화들도 상대평가에 의해 많이 들어왔다.
어쨌거나 세어보니 올해 공개작 중 관람한 영화가 딱 100편.

일단 TOP 10 부터.






올해는 트럼프 임기의 마지막을 기념하기라도 하려는 듯, 반 트럼프 정서나 반 국가주의적 성향을 짙게 띈 작품들이 유독 많은 해였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은 아론 소킨의 작가적 역량은 물론이고 감독으로서의 면모도 다시금 재확인할 수 있었던 그런 영화였다. 물론 아론 소킨 특유의 리버럴한 태세가 다소 노골적이고, 필요 이상으로 과하게 표현되어 있다는 것에도 동의한다. 그러나 이 영화엔 훌륭한 대사 작법이 있고, 무엇보다 그 풍요로운 각본을 제대로 수식해주는 세밀한 연출이 뒷받침 되어 있다. 여기에 관객들의 감정을 기어코 끌어내고야 마는 배우들의 호연은 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샤샤 바론 코엔과 프랭크 란젤라는 언급해야할 것 같다. 원래 코미디 배우들의 연기 내공이 높을 수 밖에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샤샤 바론 코엔의 이번 연기는 이례적이다. 기존의 덜 떨어진 이미지를 싹 걷어내고 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얼간이 같은 모습을 가면으로 끌어안은채 진지한 모습을 덧발라낸 그의 연기는 전체 필모그래피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순간들을 만들어낸다. 여기에 악당으로 거의 일당백의 면모를 보여주는 구두점으로서의 프랭크 란젤라 역시 훌륭하고.

잘만든 영화들이 으레 그렇듯,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은 1960년대를 다룸에도 2020년대 현재와 맑게 공명한다. 때때로 직접적일지언정, 결말 속에서 주인공들이 취하는 태도처럼 뚝심있는 올곧음을 보여주는 영화. 앞으로의 아론 소킨이 더욱 더 기대된다.

좋았던 장면 : 에디 레드메인이 연기한 '톰 헤이든'의 역취조 장면. 아군의 오류를 그냥 넘어가지 않고 굳이 끌어내려는 감독의 태도가 녹아있는 것 같아 이상하게도 객관적이라 좋았다.



09. <젠틀맨> (가이 리치)


가이 리치의 귀환이라 할 만하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젠틀맨>이 영화 역사에 길이 남을 걸작이란 소리는 아니다. 다만, 한동안 거대 프로덕션들에 휘둘리며 자신의 개성을 점차 잃어가는 것처럼 보였던 가이 리치가 정말이지 오랜만에 원래의 모습을 보였다는 점에서 나는 이 영화를 높게 평가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가이 리치가 스스로 정말 만들고 싶어 만든 영화처럼 보인다는 것. 물 만난 물고기는 이렇게 노는 것이다. 

영화는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쓸데없는 말들을 회유책으로 삼아 빙빙 돌리고 질질 끈다. 다른 영화가 이렇게 굴었다면 그저 답답하고 갑갑했겠지. 그러나 타란티노가 그렇듯, 가이 리치 월드에서는 본론보다 바로 이 '말빨'이 정수로써 존재한다. 그러니까 영화 속에서 매튜 매커너히와 찰리 허냄이 암만 멋있게 나와봤자, 결국 가장 눈에 띄는 캐릭터는 휴 그랜트의 '플레처'일 수 밖에 없는 것. 진실에 다가가기 보다 썰 푸는 것 그 자체를 본령으로 삼는 플레처가 감독의 오너캐처럼 보이는 이유 역시 바로 그 때문이다.

복선과 맥거핀, 그리고 대사 그 자체를 저글링처럼 쉴새없이 넘기며 재미와 쾌감 그 하나만 바라보며 달려가는 영화. 보고나서 금방 잊혀질 수도 있는 휘발성 강한 영화지만, 아무리 그래도 <젠틀맨>을 옹호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게 딱 내 취향이었기 때문이다.

좋았던 장면 : 플레처로 화려하게 여는 영화의 오프닝. <언컷 젬스>로 180도 다른 이미지 변신에 성공한 아담 샌들러와 더불어, 휴 그랜트의 플레처 역시 여러모로 기념할 만하다.



08. <작은 아씨들> (그레타 거윅)


원작 소설이 워낙 유명한 데다 이미 영화로 리메이크도 꽤 많이 된 텍스트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레터 거윅의 <작은 아씨들>은 기존 선배작들에 전혀 꿇리지 않는다. 고전을 가져왔지만 철저히 현재의 이야기와 메시지로 훌륭하게 포장해낸 영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는 <타운>과 <아르고>를 만든 벤 애플렉을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적자로 보았다. 그러나 2020년쯤 되니 생각이 달라진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뒤를 잇는 배우 출신 거장 감독의 반열에, 어쩌면 그레타 거윅이 가장 유망한 것 아닐까.

원작의 구조를 적절히 어레인지 해낸 것과 더불어, 캐스팅을 정말 잘했다. 순응하지 않고 기존 체제에 반기를 드는 모습으로 언제나 우릴 찾았던 시얼샤 로넌에게 이번 작에서도 남성중심적 사회 구조를 조금이나마 바꿔보는 데에 선두를 맡겼고, <파이팅 위드 마이 패밀리><미드소마> 등으로 선굵은 연기를 보여주었던 플로렌스 퓨에게 오히려 현실적이면서도 순수한 역할을 부여했다. 여기에 네 자매의 막내 역할로 일라이자 스캔런이라는 생소한 배우를 우리에게 데려다 주었으며, 다른 배우들에 비해 과소평가 받는 경향이 있고 실제로 좀 뻔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안정적으로 받쳐주는 엠마 왓슨 역시 눈에 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지는 티모시 샬라메와 로라 던, 메릴 스트립까지. 특히 메릴 스트립은 참 적절히 조화를 이뤄낸 것 같다. 메릴 스트립을 출연 시키면서 그녀가 영화 전체를 잡아먹지 않게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울까. 근데 그걸 그레터 거윅과 메릴 스트립은 해냈다.

영화 자체의 재미도 뛰어나지만, 결국 그레터 거윅은 현재 할리우드 시스템에게 이 영화를 부쳤다. 여성 위주의 영화들이 아직도 많이 투자 받지 못한다. 기획되지 못하고 개봉되지 못한다. 그런 현재의 할리우드에게, 그레터 거윅은 "안 중요해서 안 만드는 게 아니라, 안 만드니까 중요한 걸 모르는 게 아닐까?"라며 묻는다. 이 정도면 재미와 메시지 다 잡은 거 맞지.

좋았던 장면 : 자신의 글을 팔고 시내를 달려나가던 '조세핀'의 모습. <프란시스 하> 속 그레타 거윅의 '프란시스'가 겹쳐지는 듯 했다.



07. <콜> (이충현)


자주 느끼는 건데, 뻔한 설정과 소재도 겁나 재밌게 만들어 놓으면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코로나 19 때문에 극장 개봉을 미루며 표류하다가 결국 넷플릭스를 정착지로 삼은 <콜>이 좋았던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다. <시월애>와 <레이크 하우스>, <시그널> 등의 작품들이 이미 선보일대로 선보였던 과거와의 소통. <콜>은 그 전형성을 인정한채로 그냥 시원하게 돌진 해버린다. 

물론 전형적인 건 인정한다쳐도 이상한 부분이 한 두 개가 아니다. 오정세의 캐릭터는 있으나 마나 한 인물로 보여지고, 안 그래도 현재의 인물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는 과거의 인물에게 더 많은 어드밴티지를 부여 하면서 밸런스가 망가진 측면도 분명 있다. 여기에 각본의 편의상 너무나도 알맞게 느껴지는 영화의 타이밍 역시 괴상하다. 이렇게 단점이 많은 영화지만, <콜>은 그런 잔가지들을 생각할 겨를이 없도록 이야기로 고속주파한다.  그리고 이 영화에 더해진 최고의 축복, 전종서까지.

<버닝>에 이어 두번째 만남일 뿐이지만, 이 영화를 보자마자 한 마디 내뱉을 수 밖에 없었다. "앞으로 전종서는 캐스팅 콜 많이 받겠구나" 뻔하디 뻔한 싸이코패스 연쇄 살인마 캐릭터에 이토록 신선한 생동감을 양념해내다니, 그녀는 과거 시점이든 현재 시점이든 어느 타이밍 가리지 않고 항상 무서웠고 파워풀했다. 그야말로 전종서 연기 보는 맛이 있는 영화.

좋았던 장면 : 집안을 가득 메운 냉장고 장면. 그 이미지 딱 하나로 그동안의 이야기들을 한 방에 설명해버리는 좋은 시각적 연출이었다고 생각한다. 





<콜>과 선정 이유가 비슷하다. <콜> 못지않게 이야기는 뻔하지. 은퇴를 앞둔 킬러가 생애 마지막 임무라며 덥썩 받아든 것이 결국 죽음으로 향하는 길이었음을. 여기에 어린 소녀까지 추가되고 그들을 죽어라 쫓는 매서운 살인귀까지 더해지니 <레옹>과 <테이큰>, <아저씨>까지 떠오르는 영화들이 앉아번호로 연방장 두 바퀴다. 그러나 <콜>이 그랬듯,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역시 익숙한 이야기를 오히려 동력으로 삼아 빠르게 이야기를 주파하는 힘이 있고, 최근 다소 뻔하게만 느껴졌던 황정민이라는 배우의 잊고 있던 활용도를 다시금 끄집어내 그에게 새삼 다시 매력을 부여 하기도 했다. 

허나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란 게, 결국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의 진정한 성취는 바로 촬영이라는 것이다. 이른바, 감독보다 촬영감독의 역할과 기여도가 더 크게 느껴지는 영화. 일본과 태국 등, 여러 해외 로케이션들을 오가며 진행되는 영화에서 홍경표는 각국의 컬러 톤과 콘트라스트를 개별적으로 설정해내 그 자체로 보는 맛을 높인다. 도쿄의 푸른 빛, 방콕의 누런 빛. 그 모두가 스스로, 시네마틱한 것이란 무엇인가-를 열과 성 다해 대답하고 있는 것 같았다.

클라이막스의 액션 시퀀스가 좀 더 큰 규모로 진행되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긴 하다. 이렇게 아쉬움이 아주 없진 않은 영화지만, 그럼에도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는 올 한 해 극장에서 보았던 한국 영화들 중 내가 가장 즐기면서 봤던 영화다. 블루레이나 빨리 나왔으면 좋겠다.

좋았던 장면 : 보여주기 보다 오히려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더 많은 걸 설명해내는 영화의 오프닝 도쿄 장면.



05. <그레이하운드> (애런 슈나이더)


전쟁 영화는 보통 그 규모의 스펙터클만을 강조하기 마련이다. 바로 그 점에서 <그레이하운드>는 특별하다. 물론 광활한 대서양을 배경으로 삼아 여러 전투함들과 잠수함들이 엉겨붙는 액션의 규모 역시 크고 멋진 영화다. 그러나 <그레이하운드>의 진가는 다른 데서 드러난다. 이 영화는 철두철미한 성격의 당직사관이 꼼꼼히 작성한 보고서를 읽는 듯한 기분을 내게 전달해줬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자막으로 상황 설명은 물론 날짜와 구체적인 시간대까지 묘사하고, 갑판 위 해군들의 디테일한 생활상과 임무 수행 모습까지 효과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영화거든.

그러면서도 톰 행크스가 연기한 주인공 '어니스트 크라우스'라는 인물이 처한 상황과 그에 따른 감정을 아주 콤팩트하게 잘 전개하고 있기도 하다. 일견 쓸모 없어 보이던 짧은 과거 시점 이야기를 통해 영화 전반에 걸친 이 인물의 심정을 어깨 너머로 살펴보게 해준다. 그리고 이를 통한 강한 딜레마. 여기에 무엇보다, 이 인물이 소박하고 진솔하되 능력 역시 출중한 인물이라 더 기뻤다. 각종 PTSD와 트롤링으로 얼룩지기 쉬운 전쟁 영화에서 이토록 올곧은 인물을 주인공 삼아 항해할 수 있다니. 최근 본 전쟁 영화 속 주인공들 중 가장 마음이 가는 인물이었다.

그렇다고해서 볼거리가 또 떨어지는 영화는 아니다. 수많은 포탄과 기관총 세례를 피하고 또 뚫으며 전개되는 영화의 해상 전투는 그 자체로 파워풀하다. 극장 개봉 없이 애플 TV를 통해서만 배급된 걸로 알고 있는데, 더 큰 극장용 스크린으로 관람 했다면 어땠을까-라는 아쉬움이 짙게 남는 그런 작품.

좋았던 장면 : 여러 보급선들 중에서 어떤 것을 구해야할지 짧고 깊은 딜레마에 빠지는 어니스트의 모습. 여기에 강렬한 전투의 스펙터클은 덤.



04. <히어로는 없다> (데이빗 갈란 갈린도)


올해 봤던 영화들 중 가장 낄낄 대며 봤던 영화. 단연코 서브 컬쳐에 내린 영화적 축복이라 말하고 싶다. 표면적으로는 수퍼히어로 영화들과 그 원작이 되는 코믹북 경계 안에서만 패러디하고 노는 영화처럼 보이기 쉽지만, 다 보고 나면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스타워즈>나 <해리 포터> 같은 강력한 팬덤을 지닌 프랜차이즈물도 말장난 대사로 끊임없이 건드리고, 인물들의 관계와 그 상황은 또 <세븐> 같은 장르 걸작들 역시 흡수한다. 소위 말해, 덕력 강한 덕심 테스트 영화. 

때문에 여러 영화와 만화, 게임, 기타 서브 컬쳐들에 익숙하면 익숙할 수록 더 큰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영화. 재밌는 건, 어쨌거나 그 본류는 B급 마이너 감성이라는 것이다. 대규모 예산이 책정된 블록버스터 영화는 아니다보니, 극중 액션 묘사나 스케일은 잘 쳐줘봐야 <킥애스> 정도 밖에 안 된다. 근데 이 영화엔 또 그 정도의 스펙터클이 더 잘 어울린다는 게 함정.

더불어 이 영화를 이번 리스트 4위에 올림으로써 나의 취향과 그 정체성이 더욱 더 공고히 되는 느낌이다. 누군들 알았나, 이 리스트에서 <맹크>가 나가리 될 줄. 물론 <맹크> 좋은 영화지만, 어쨌든 내 취향은 장르물이다보니 결국 이 영화의 손을 들어줄 수 밖에 없었다. 이거 시리즈로 2편 나와도 꽤 괜찮을 것 같긴 한데.

좋았던 장면 : 그냥 잔잔하게 다 좋았다. 주인공 콤비가 대중문화로 썰 푸는 것만 두 시간 내내 봐도 안 질릴 듯.



03. <언컷 젬스> (조슈아 사프디 & 벤자민 사프디)


개봉 당시 <블랙 스완>을 보고 나서 진이 다 빠졌었다. 뭐랄까, 앉아서 보는 것만으로 칼로리를 소모케하는 영화였다고나 할까? 그리고 바로 그 경험을, 10여년이 지나 <언컷 젬스>에서 다시 느끼게 되었다. 결국 다 보고 나면 이게 대체 뭔 내용이었는지, 품고 있는 교훈은 뭔지 헷갈릴대로 헷갈리게 된다. 그런데 그냥 최면에라도 걸린 것처럼 홀려서 끝까지 보게되는 영화.

사프디 형제의 연출작으로써는 전작인 <굿 타임>에 비해 월등하다고 느껴진다. 물론 <굿 타임>에도 독보적인 연출 감각이 존재했지. 근데 그 영화는 이상하게 정이 안 갔어. 화이트 트래시를 다루고 있다는 것도 알겠는데, 일종의 허무주의로 끝나는 것도 알겠는데 어쨌거나 와닿지는 않더라고. 허나 <언컷 젬스>는 괴상하게 파워풀하고, 기묘하게 달콤하다. 진력이 나는데 계속 보고 싶은, 영화 자체가 언컷 젬스 같음.

그리고 누가 뭐래도, 올해 최고의 퍼포먼스에 가까운 아담 샌들러의 연기가 있다. 근 10여년 동안 어딘가 나사빠진 듯한 코미디 연기만으로 일관했던 배우가, 갑자기 독기를 품었을 때의 진풍경. 작년 <조커>에 호아킨 피닉스가 있었다면, 올해엔 <언컷 젬스>의 아담 샌들러가 있었다. 이 영화가 품고 있던 하늘을 뚫고 지축을 뒤흔드는 팽팽한 영화적 장력의 대부분은 모두 아담 샌들러에게서 나온 것이다.

좋았던 장면 :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는 영화의 엔딩. 통쾌한데 허무하고, 괴로운데 개운한. 



02. <조조 래빗> (타이카 와이티티)


혐오와 갈등의 시대에 타이카 와이티티가 외친 히틀러 친양 영화. 그래서 오히려, 현재의 혐오와 갈등을 더욱 더 경계하게 만드는 강력한 우화. 그리고 그런 거 다 떼고 보아도 너무나도 예쁘고 슬픈 동화. 

리스트 내 <히어로는 없다>나 <언컷 젬스>와는 그 장점의 결이 다른 영화다. 앞선 그 두 편이 엄청난 장점과 툭 튀어나온 매력으로 무장한 영화였다면, <조조 래빗>은 미친듯이 뛰어난 구석은 없더라도 전체적으로 안정적인 연출로 조율되어 있어 더욱 더 빛나는 영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토르 - 라그나로크> 외엔 타이카 와이티티의 연출작을 따로 본 게 없었기 때문에 그의 영화적 스타일에 대해서 아직 의아한 부분이 있었는데, <조조 래빗>까지 보고나니 이 사람 영화는 그냥 당분간 닥치고 봐야겠다 싶었음. 

그리고 출연 배우들의 연기들이 전반적으로 다 훌륭한데, 스칼렛 요한슨 만큼은 꼭 언급하고 싶었다. 작년 <결혼 이야기>에서도 커리어 하이를 보여줬었는데, 이번 영화에서는 스크린에 아늑함 만을 더하는 연기였다. 

좋았던 장면 : 엄마의 신발을 마주친 '조조'. 헉-소리가 나는 좋은 연출이었다.



01. <1917> (샘 멘데즈)


1위는 역시 그 영화. 

비판 받을 만한 지점이 있다는 것, 잘 안다. 원 컨티뉴어스 샷 컨셉으로 촬영된 영화 전체. 그걸 구현해낸 로저 디킨스의 능력은 유려 하지만, 때때로 그 기술적 성취 하나만을 위해 영화가 움직이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하기도 한다. 

그러나 <1917>을 이 리스트의 1위로 꼽은 이유는 그런 기술적 성취 때문만이 아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이야기와 감정이였다. 메신저로 발탁된 주인공이 모두를 구하기 위해 달려나가는 숭고함. 죽음과 구분되기 위해 부르르 몸을 떠는 삶의 약동. 그 모든 게 <1917>엔 있었다. 그러니까 이것들만 유지해준다면, 설사 이 영화가 여러 쇼트로 촬영된 일반적인 영화라고 했을지라도 결국엔 내 마음을 움직였을 것이다. 

좋았던 장면 : 대횡단의 상황에 참호 밖으로 나가 기어코 종단의 질주를 해버리고야마는 주인공의 모습. 그 숭고한 희생에 눈물을 머금을 수 밖에 없었다.



올해를 빛내준, 나의 감독들을 마지막으로 모시며-




최고가 있으면 최악도 있는 법. 올해 최악의 BOTTOM 05.



05. <365> (바르바라 비아워봉스 & 토마시 만데스)


값싼 포르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는 생각이지. 아니지, 차라리 포르노였다면 아예 노골적으로 성기 노출도 다 할 수 있었을 텐데 그거에 비하면 이 영화는 그냥 어중간 하기만 하다. 일반적인 영화들에 비해 수위가 높다고는 하지만 결국 기본적으로는 20여년 전에 한국에서 유행했던 인터넷 소설, 또는 10여년 전에 유행했던 미국의 영어덜트 소설들과 그 궤를 같이 하는 영화다. 그냥 주 타겟이 되는 3,40대의 여성들이 느끼기에 자극적일 만한 소재와 전개들만 몽땅 때려박은 격. 그런 정밀 타격에만 관심을 두다 보니, 결국 영화의 현실성과 개연성은 거의 막장 수준으로 망가졌다. 씨팔, 대체 어떤 여자가 납치당한 상태에서 자기 납치한 범죄조직 두목이랑 그렇게 희희낙락하며 쇼핑하고 다니냐고. 그 두목이 암만 잘생겼다해도 그렇지. 근데 심지어 영화 결말도 제대로 안 냄. 진짜 꼴보기 싫었다.



04. <얼론> (자니 마틴)


사람들이 그랬지, <#살아있다> 정말 최악의 작품이었다고. 내 생각은 좀 다르다. 물론 <#살아있다>가 정말 형편없는 작품이었던 것은 맞다. 그러나 그 영화와 자매 관계쯤 되는 <얼론>까지 보잖아? 그럼 <#살아있다>는 다시 보니 선녀 같은 작품이 된다. 그래도 <#살아있다>는 최소한의 시네마틱한 룩과 유명 배우들의 호연이라도 있었잖아. 그에 비하면 <얼론>은 그냥 총체적 난국이다. 이야기 전개도 재미없을 뿐더러 액션이라 할 만한 것도 없고, 무엇보다 주연배우의 연기가 안쓰러울 정도로 떨어진다. 근데 대체 무슨 생각이었는지 결말도 그딴 식으로 냈음. 이 정도면 그냥 만들다 만 영화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03. <피어리스> (코리 에드워즈)


<1917>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를 했었다. 영화에 있어 기술적 성취도 중요하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이야기라고. 그러나 <피어리스>를 보게 되면 생각이 좀 달라질 거다. 이 영화는 기술적으로 너무 후졌다. 캐릭터 디자인부터 그외 프로덕션 디자인까지 모두 다 성의없는데다 투박하고 거칠기만 하다. 그리고 그걸 구현해낸 애니메이션 기술도 계속 보고 싶은 맘이 안 생길 정도로 재미없음. 그렇다고해서 내가 이 영화에 픽사나 드림웍스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 퀄리티를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픽사가 <몬스터 주식회사>에서 그랬듯이, 인물들의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을 모두 컨트롤 해내는 그런 식의 기술력을 바란 것까지도 아니었다고. 그러나 그 기준을 한참 내려서 보아도 <피어리스>는 기술적으로 촌스럽게만 느껴진다. 아,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의 이야기가 뛰어나다는 것은 또 아님.



02. <이제 그만 끝낼까 해> (찰리 카우프만)


이미지는 존나 좋은데 그걸 기괴한 작가주의 정신으로 싹 다 말아먹은 영화. 이건 시공간이 말 그대로 오그라들어 한 지점에 뭉치게 된 건지, 아니면 여러 평행 우주들이 섞이게 된 건지, 그도 아니면 그냥 주인공의 환상인 건지 구분이 안 간다. 물론 영화가 뭘 하려고 하는 건지 역시 이해가 안 감. 호러 연출 같기도 하다가 결국 또 이상한 철학적 논제로 빠지고. 뭔 놈의 자동차 안 대화 씬이 20분 이상 나오냐. 별 재미도 없더구만. 말 그대로 그냥 재미없는 영화. 찰리 카우프만은 잡아줄 제작자나 다른 감독이 필요한, 그야말로 각본가 역할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내다.





보는내내 언제 끝나는 건지 시계만 봤던 영화. 전개도 유치한데 심지어 개그도 못해. 다른 것도 아니고 이거 코미디 영화 아냐? 그럼 장르적으로 최소한의 한도는 지켜줬어야지. 그러나 <미스터 주>는 어떻게 뜯어봐도 재밌는 구석이 없었다. 그냥 더럽게 재미없었던 영화. 여기에 배우들의 엉성하고 안쓰럽기 짝이없는 연기는 덤. 올해 초에 봤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그 살인적인 지루함이 몸 어딘가에 남아있는 것만 같다. 



0. 특별언급


<라스트 제다이>를 재밌게 봤음에도, <라이즈 오브 스카이워커>는 그냥 용서가 안 된다. 객관적으로 보아 올해 최악의 영화까지는 아니었지만, 시리즈의 오래된 팬으로서 그냥 구역질이 났다. 거의 반 백년 역사를 지닌 유서깊은 시리즈의 마지막이 겨우 이딴 식이라니. <라스트 제다이> 볼 때까지만 해도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것까지 다 보고나니 다른 팬들 말마따나 시퀄 3부작 전체를 부정하게 된다. 조지 루카스 이 영감탱이가 언젠가 어디에라도 나와 딱 한마디만 해주면 좋으련만. "시퀄 이거 정사 아님"




한 해가 갔으니 춤이나 한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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