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04 23:23

다이 하드, 1988 대여점 (구작)


불세출의 액션 걸작. 그리고 내 기준 최고의 크리스마스 영화. 

같은 미국 액션 영화계의 80년대 동기이자 최강의 동명 3인방 존 패거리 '존 람보'와 '존 매트릭스'에 비해, <다이 하드>의 주인공 '존 맥클레인'이 갖는 특이점은 그가 이죽거리기 고수에다 깝죽거리기 쌉고수라는 점이다. 그러니까 이 양반은 악당에게 쳐맞으면 쳐맞았지, 곧죽어도 말빨로는 안 지려고 하는 아가리 파이터 상마초인 것이다. 때문에 존 맥클레인의 손에는 항상 악당 두목과 음성채팅을 가능케하는 무전기가 쥐어진다. 1편에서부터 나름 4편까지 이어지는 시리즈의 전통 아닌 전통.

액션의 빌미로 작용하는 설정이 존나 간단한데 그게 또 쌈빡하고, 그 액션을 수식해주는 감정적 측면 역시 가벼우면서도 강력해서 그냥 솔깃하게 된다. 액션의 배경을 넓은 정글이나 사막으로 산개 해놓지 않고, 오히려 높고 좁은 빌딩에 가둬버림으로써 주인공에게 장애물을 부여한 점. 그게 특히 좋다. 과거 8,90년대 미국 액션 영화들의 빅 팬이라면 나카토미 빌딩을 모를리 없겠지. 이 고층빌딩 안에서 엘리베이터 통로와 환기구를 통해 악당들을 요리조리 피하며 결국 미겜천을 찍어내고야마는 주인공의 모습에 감탄을 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특히 테러 집단의 부두목쯤 되는 간부와 그 부하, 이렇게 두 명에게 쫓기며 몸을 던지는 맥클레인의 모습은 그야말로 옛 시대의 수퍼 액션 히어로라 할 만하다. 이 장면은 진짜 그냥 재밌는 것 같다.

여기에 액션에 강한 동기를 부여해주는 인간적 드라마가 결부된다. 총알을 피하며 수퍼 액션 히어로로서의 면모를 과시하는 이 남자 역시 결국은 한 여자의 남편일 뿐. 악당들 앞에서는 수다맨이 되는 맥클레인이 아내인 '홀리'에게만은 유독 무뚝뚝하다는 묘사가 재미있다. 거의 가정 파탄의 직전처럼 보였던 상황에 결국엔 그녀를 구원하고자 하는 남자의 이야기. 그 자체로도 흡입력이 쩌는데 각본가는 이걸로 서스펜스도 짜낸다. 맥클레인의 아내이자 유일한 약점을 바로 앞에 두고도 그걸 알아채지 못하는 '한스 그루버'. 근데 나중엔 또 알게 돼. 이 부분의 전개 역시 백미다. 아, 이걸 또 다르게 변주 해낸 부분도 재밌지. 비무장 상태의 테러 집단 두목과 마주쳤으면서도 그의 신들린 연기와 낯선 얼굴에 바로 알아보지 못하는 존 맥클레인의 장면 역시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튀어나와 센스 있었음.

그치만 결국엔 그냥 캐릭터가 좋다. 앞서 말했듯 존 맥클레인은 끊임없이 빈정거리는 캐릭터인데, 실력없이 말만 많았으면 그냥 물에 빠져도 입만 동동 뜰 양반 정도로 치부되고 말았겠지. 근데 싸움도 존나 잘함. 무식하게 그냥 닥돌하는 스타일도 아니고 머리도 허벌나게 잘 써요, 또. 엘리베이터 통해서 폭탄과 시체를 배송하질 않나, 나름 형사 답게 경찰들의 대응 체계를 이미 잘 알고 있어서 그에 따라 반응한다든가. 남자는 그냥 자기 일만 존나 잘하면 섹시해보이는 것이다. 그렇다, 존 맥클레인은 섹시하다.

람보와 매트릭스에 비해 악당들에게 많이 쳐맞는다는 점도 좋다. 그런 묘사가 그를 무척이나 현실적으로 보이게끔 해주고, 무엇보다 <다이 하드>라는 제목과 그를 잘 이어준다. 때와 장소를 잘못 골라서, 어쩌다보니 사건을 해결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는 남자. 주인공 입장에서야 거지같은 설정이겠지만, 이렇게 재밌고 찰진 설정이 또 없다. 

브루스 윌리스도 섹시하게 나오기는 하는데, 역시 한스 그루버를 연기한 알란 릭맨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다. '신사 같은 악당'이라는 일종의 클리셰에 불을 지펴버린 사람. 민간인인 척하며 맥클레인 앞에서 소리지르는 장면도 좋고, 기품있게 테이블 뒤에 앉아 모든 걸 컨트롤하는 모습도 멋지다. 이 시리즈 정주행과 더불어 <해리 포터> 시리즈도 함께 보고 있는데, 참 여러모로 알란 릭맨이 그리워지는 나날들이다.

뱀발 - 크리스마스 노래로 영화가 끝난다. 'Let it snow, let it snow, let it snow'. 크리스마스 이브에 봐서 더 좋았던 것 같다.

핑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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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서 마음 한 구석이 뜨끔 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좋은 배우들이 은근히 많이 나오는 영화지만, 커트 러셀을 제일 좋아해서... 커트 러셀은 정말 &lt;다이 하드&gt;의 브루스 윌리스 다음으로 하얀 런닝이 잘 어울리는 사내다. 블루 칼라 노동자 계열의 영웅이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 여기서도 달리고 뛰어오르는 등의 ...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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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IOTA옹 2021/01/05 10:43 # 답글

    중학생때 3개봉에 맞춰 봤다가 깊게 빠진 액션영화계의 걸작이네요!
    좋은 영화는 언제봐도 즐겁기에 1,2,3 편 비디오 테이프를 사서 늘어질때까지 반복 감상했네요.

    주 조연 할거 없이 캐릭터성이 강했고 그게 스토리에 잘 버무러져 있어서 좋았습니다.

    동생잃은 테러범2인자 아재의 복수심이라던가
    인상깊은 조연인 흑인 경찰아재의 트라우마 해소 같은것도 만들려면 영화 한편 만들수 있을거 같은 이야기인데 몇줄의 대사와 한번의 행동으로 잘 살려내서 기억에 남네요.

    비디오가게에서 공짜로 주는 출시 홍보전단에 3스토리가 1에서 동생을 잃은 형의 복수라 해서 테러범2인자아재가 살아돌아왔나 했었는데 아니었던 추억도 떠오르는군요.
  • CINEKOON 2021/01/08 10:53 #

    이상하게 이런 영화는 블루레이나 DVD 보다 비디오 테이프가 더 잘 어울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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