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14 11:53

스파이 게임, 2001 대여점 (구작)


토니 스콧이 자신의 절정기를 거의 다 소진 했을 때쯤 나온 명작. 그리고 여러 의미에서 장르적인 영화.

내용은 생각보다 별 게 없다. CIA 은퇴를 앞둔 '네이선 뮤어' 앞에, 자신의 부하 직원이자 업계 제자였던 '톰 비숍'이 중국 내 감옥에 투옥되어 처형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온다. 이를 막기 위해 긴급 소집된 CIA의 간부들. 이들 앞에서 뮤어는 자신이 비숍을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가장 최근에 이르기까지 그 둘 사이의 썰을 브리핑 하게 된다. 그렇게 현재 시점의 CIA 회의실과, 뮤어의 입을 빌어 묘사되는 과거 시점의 뮤어 & 비숍 관계가 끊임없는 교차 편집으로 얽히고설키며 진행되는 영화. 그러니까 <007>이나 <본> 시리즈 식의 액션이 가미된 첩보 영화를 기대했다면 말짱 꽝인 영화다. 굳이 따지면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와 <본> 시리즈 그 사이 어디쯤엔가 존재할 법한 영화임.

근데 이 단조로우면서도 복잡한 이야기 구조가, 당시 절정기였던 토니 스콧의 손에서 매끈하게 재조립됐다. 여러 시점을 날래 오가는 데도 영화의 편집 리듬과 흐름이 유려해서 관객 입장에서는 헷갈릴 일이나 지루할 일이 별로 없게 된다. 여기에 너무 닮아서 진짜 부자 사이라고 해도 믿을 법한 로버트 레드포드 & 브래드 피트 조합이 덩달아 좋기도 하고. 특히 로버트 레드포드가 정말 좋다. 브래드 피트도 물론 대단하지. 그러나 영화의 결말까지 보고 나면, 결국 이 영화는 온전히 로버트 레드포드만의 것이구나- 하게 된다. 좀 다른 시각에서 보면, 이 에스피오나지 장르 그 자체가 인격화 된 존재로서 이 로버트 레드포드의 네이선 뮤어 캐릭터가 존재하는 것 같기도 하고. 

말 나온 김에. 에스피오나지 장르, 그러니까 첩보 장르의 세계에서는 '정보' 그 자체가 무기로써 존재한다. '어떠한 사실'에 대해 내가 상대보다 얼마나 빨리,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가 이 세계에서는 드래곤볼로 작용하는 것이다. 더 좋은 연사력을 가진 소총이나 볼펜 폭탄 따위로 승부를 보는 곳이 아닌 것이다. 네이선 뮤어는 이 장르의 화신이라도 되는양 그걸 너무 잘 보여준다. 그의 늙은 몸뚱아리는 영화 내내 CIA 본부 근처만을 맴돈다. 그러나 자신이 갖고 있는 정보와 상대방으로부터 빼앗은 정보를 조합하고 활용해 지구 반대편의 문제를 막아내는 데에 최선을 다한다. 물론 그 상대방의 정보 빼앗는 묘사들도 다 기가 막힘. 따지고 보면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 오히려 그래서 더 현실감 있었다. CIA 생활이 거의 30년이라는데, 짬에서 나온 바이브란 과연 이런 것일까 싶었다.

여기에 그 정보들을 다 조합해서 활용해내는 것도 능력이지. '정보'는 그 자체만으로는 무기화되지 않는다. 어느 타이밍에 이 정보를 터뜨릴 것인지부터 시작해, 언론 등을 위시한 여론은 어떻게 바꿔 만들어낼 것인지, 이역만리 땅에 있는 인맥 네트워크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까지 정보 무기화의 다양한 측면을 네이선 뮤어의 짬밥 정신을 통해 볼 수 있다. 

이렇게 장르적인 재미가 출중하지만, 품고 있는 메시지 역시도 맘에 들었다. 에스피오나지 장르, 그러니까 첩보 장르의 세계에서는 '사람'이 수단으로써만 존재한다. 이런 종류의 영화들 속 등장인물들이 매번 하는 말 있지 않나. 더 큰 대의를 위해서라고.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거라고. 이른바 애국과 세계 평화라는 미명 하에서, 그동안의 이 장르는 수많은 개인들을 포기해왔다. 작전 노출을 핑계로 애지중지 키워온 요원들을 적진 한 가운데에 버리고 비정하게 떠났으며, 그들이 체포 되었을 땐 국가가 전면에 나서 이들과의 관계를 부정해왔다. 정보원들에게도 신변 보호를 내세웠지만 결국 단물이 다 빠지면 그들을 버렸으며, 개인의 희생은 전체의 이익을 위해 필수적인 것임을 자주 합리화해왔다. <스파이 게임> 속 톰 비숍도 네이선 뮤어에게 말하지 않나. 그들을 보호해주겠다고 한 말 다 거짓이었냐고. 이딴 짓을 우리가 계속 해야하는 거냐고.

여기에 네이선 뮤어는 칼같이 대답한다. 그게 이 세계의 현실이고 어쩔 수 없는 생리라고. 우리는 앞으로도 쭉 이럴 것이고, 설사 너가 그런 상황에 처한다해도 나는 널 가차없이 잘라낼 것이라고. 그러니까 <스파이 게임>의 중반까지만 보면, 여러 의미에서 네이선 뮤어가 이 장르의 화신처럼 느껴지는 것이 당연해 보일 지경이다. 에스피오나지 장르가 인격화 되어 나타나 자신의 여러 고유 특성들에 대해 변명하고 어쩔 수 없다며 배 째라는 식의 태도로 일관하고 있으니. 그러나...

영화가 결말에 들어서면, 이 생각 역시 조금씩 바뀐다. 아, 물론 여전히 네이선 뮤어가 이 장르의 인격화된 화신처럼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네이선 뮤어는 결국 현재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또 희생해 끝내는 톰 비숍을 구해내지 않나. 그러니까 바꿔 말하면, 에스피오나지 장르가 스스로의 과오를 인정하고 어쩔 수 없다 변명 하면서도 결국 마지막엔 반성하는 태도를 보인다는 것. 원래 하던대로 그냥 버리고 가면 됐을 톰 비숍을 끝내는 구해내며 반성적인 모습을 견지한다는 것. 결국 나는 여기에서 인간적인 감동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정리. <스파이 게임>은 정보를 무기로 삼는 장르의 지적 쾌감이 있는 영화인 동시에, 사람을 수단으로 쓰는 장르의 진한 죄책감이 머물고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장르의 쾌감 끝에 다가온 가장 인간적인 감동. 저녁 외식 작전은 그 작전명처럼 사뭇 설레는 작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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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트 스릴러' 정도로 홍보되고 있는 모양새인데, 사실 장르 특유의 지적인 면모는 평균에 비해 많이 떨어지는 영화라 생각한다. 다만 그럼에도 좋았던 이유는, &lt;스파이 게임&gt;이나 &lt;공작&gt;이 그랬던 것처럼 이 예측불가하고 신뢰불가능한 첩보의 세계에 인간의 마음을 담았다는 것. 바로 그 점에서, &lt;더 스파이 ...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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