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15 21:47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 2001 대여점 (구작)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의 꼬꼬마들과 어른이들을 책벌레로 변태 시켜냈던, 그야말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판타지 소설의 영화화. 개봉 당시 이걸 처음 봤을 때 극장 외벽에 걸려있던 포스터가 아직도 생각난다. 옛날의 지방 극장들이 으레 그랬듯, 이 영화 역시 이 방면 전문가가 다시 그려낸 그림 포스터로 홍보되고 있었거든. 공식 포스터의 대형 인쇄물이 아니라 그걸 보고 다시 그려낸 그림을 극장 외벽에 걸던 시대라니. 정말이지 다시 생각해도 격세지감이다.

시리즈가 뒤로 갈수록 점점 더 어두워지는 경향을 띄었기 때문에, 화사한 동화 같았던 그 느낌을 기억하는 일부 팬들은 여전히 크리스 콜럼버스 감독을 그리워할 것이다. 사실 나는 알폰소 쿠아론이 연출했던 3편 이후부터의 시리즈 기조를 더 좋아했기 때문에 이 1편에 대해선 그다지 큰 추억이 없었는데, 정말이지 오랜만에 다시 보니 크리스 콜럼버스가 연출도 꽤 괜찮게 했던 편이더라고. 향후 무려 7부작으로 전개되는 대서사시의 첫편으로써 캐릭터 소개는 물론 자질구레한 세계관 설정들까지도 다 해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을 터인데, 크리스 콜럼버스가 그걸 빼어나진 못해도 꽤 안정적으로 해냈다는 인상이다.

실제로 영화의 초반 이야기 전개가 꽤 빠른 편이다. '해리 포터'가 어떤 아이인지, 왜 그는 고모와 고모부에게 미움 받으며 계단 아래 벽장에 살고 있는지, 그가 마법사로서의 능력을 발현했던 첫 순간이 언제인지, 그리고 그런 해리가 호그와트로부터 입학 편지를 받게 된 경위는 어떠한지 등이 나름 빼곡하게 묘사된다. 원작 소설이 그랬던 것 마냥 이 모든 걸 각잡고 설명 해냈으려면 꽤 긴 런닝타임이 물리적으로 필요했을 터인데, 크리스 콜럼버스는 설명이 꼭 필요한 부분들에 대해서만 딱 알맞은 키 비주얼로 표현해냈다. 그리고 그게 썩 잘 먹혔다.

아니, 말 나온 김에. 거의 비주얼로 다 해먹었던 영화다. 촬영이나 조명적 측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각자의 나이나 세대가 어찌되었든, 우리가 이 시리즈에 대해 이야기 나눌 적에 가장 먼저 떠올리게 되는 건 어쩔 수 없게도 대부분 이 1편에서 파생된 것들일 것이다. 무거운 소포를 들고 하늘을 가르는 부엉이, 벽난로와 우체함 곳곳에서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편지 봉투들, 몇 번을 돌려보아도 질리지 않는 호그와트 성의 외관과 쉴새없이 펄럭거리는 퀴디치 경기장, 여기에 하염없이 따뜻하고 아늑하게만 느껴지는 그리핀도르 기숙사의 모습까지. 의상과 소품을 비롯한 전반적인 프로덕션 디자인의 체계를 워낙 잘 잡아놨기 때문에, 이후 나오는 일곱 편의 시리즈가 모두 이 1편에서의 그것을 그대로 계승하는 모습을 보인다. 풍문에 따르면 이를 위해 크리스 콜럼버스가 원작자인 조앤 K 롤링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고 하는데, 사실이야 어찌되었든 이 정도면 진짜 잘 만들어놓은 거지.

이렇게 잘 깔아놓은 판에 흥미를 돋구는 이야기가 꽂힌다. 사실 이 시리즈는 언제나 장르물이었다고 생각한다. 대놓고 판타지 영화인데 당연하지 않냐고? 아니, 내 말은 판타지 외의 장르가 꼭 하나씩은 더 있었다는 거다. 그건 바로 미스테리 스릴러. 따지고 보면 매 시리즈마다 미스테리 스릴러로써의 공식이 꽤 잘 잡혀있는 편이었다. 이야기 전반에 복선이 깔리고, 누군가가 다치거나 뭔가를 도둑맞는 등의 사건이 발생하며, 이에 해리와 친구들은 여러 능력들을 사용해 추리에 추리를 거쳐 용의자를 특정 해낸다. 영화가 이것도 꽤 잘해냈다고 본다. 마법사의 돌까지 가는 데에 깔린 복선들과 그것들을 활용해 주인공 일행이 추리를 완성해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 자체로 스릴감이 든다. 어린애들이 주인공인 학원물에서 이 정도 스릴러를 뽑아냈다는 건 확실히 특기할 만하다. <추리영역 4교시> 같은 영화들 보면 그게 얼마나 어려운 건지 감이 잡히잖아.

벌써 20년이나 된 작품이다보니 영화 곳곳에 묻은 CG나 특수효과가 촌스러워 보이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은 관객들이 이후 못해도 30여년은 더 추억할 수 있는 일종의 물리적인 공간을 제시했다. 말그대로 그냥 호그와트라는 가상의 공간을 실제의 공간으로 바꿔놨다. 줄줄이 나오는 속편들 외에도 스핀오프 영화, 관련 비디오 게임 등 원작 소설과 관계되는 모든 매체들이 몽땅 다 이 영화의 디자인을 베이스로 할 수 밖에 없게 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관객과 팬들, 그들의 머릿속 상상 역시 곧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다. 지금 보면 아이고, 귀여워라- 라고 할 수 있는 영화지만 그와 동시에 너무나도 강력한 비주얼 역시 제시했던 영화. 막말로 이거 말아 먹었으면 제아무리 원작 소설 시리즈가 날고 긴다 했어도 그 영광이 지금까지 지속 됐었겠냐고. 시리즈의 최고작을 만든 감독까진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이 당시의 크리스 콜럼버스를 우리가 치하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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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포스21 2021/01/15 23:34 # 답글

    1,2 편은 본거 같은데.. 그이후는?
  • CINEKOON 2021/01/31 16:17 #

    이번 기회에 정주행 시작하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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