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16 12:59

해리 포터와 불의 잔, 2005 대여점 (구작)


애들이 급하게 큰 것도 모자라, 갑자기 장발머리를 하고서 등장했다. 

제작진도 골머리를 앓았을 것이다. 해당 에피소드의 원작 소설이 이전 작들의 그것에 비해 훨씬 더 두꺼웠으니. 네 권짜리 분량을 두 시간짜리 영화에 다 때려박아야만 한다는 강박감에 잘려나간 부분들이 한 두 개가 아니다. 그러나 나야 뭐 언제나 그랬듯 원작 제일주의자와는 거리가 멀고, 소설과 영화의 포맷이 엄연히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기도 해야하니 그냥 그러려니 할 수 밖에. 다만 해당 에피소드의 원작에서는 출연했던 '도비'가 이 영화에도 잠깐이나마 나왔으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이 있다. 딱히 도비를 좋아하는 건 아닌데, 2편 이후 아무 소식도 없다가 7편 말미에 갑자기 튀어나와 그렇게 되는 게 좀 뜬금 없었거든. 3편부터 7편 중반까지 깜깜 무소식이다가 툭 튀어나오니까 꼭 그렇게 만들기 위해 다시 데려온 애처럼만 느껴지잖아.

감독이 또 바뀌었다. 이번작의 연출자는 마이크 뉴웰. 1편 & 2편이 가족 영화의 대가를 감독 자리에 앉혔고, 3편이 성장 영화의 거장을 그 자리에 이어 앉혔다면, 이번에는 멜로 드라마적 감수성을 가진 감독을 데려온 것. 때문에 영화의 액션 묘사나 스릴러적 면모는 다소 들쭉날쭉한 인상이지만, 그럼에도 아이들의 무도회 시퀀스는 확실히 보는 맛이 있다. 그러니까 이게 미묘해. 그 무도회 시퀀스는 통째로 꽤 괜찮은 편인데, 나머지가 다 그저 그래서...

할 말도, 할 일도 많은 에피소드이다보니 영화는 쉴새 없이 달려 나간다. '케드릭 디고리'도 얼른 소개한 다음에 퀴디치 월드컵 가야지, 거기서 또 죽음을 먹는 자들과 맞대면 하며 '바티 크라우치' 1세와 2세도 언급해야지, '빅터 크룸'도 어쨌거나 나와야하고... 그러다보니 퀴디치 월드컵 날아감. 근데 사실 이건 별로 불만이 없다. 영화가 뭔 스포츠 중계도 아니고, 퀴디치 월드컵 보고 싶었으면 그냥 당시 판권 갖다 만든 비디오 게임에서 퀴디치 플레이하는 게 더 나았을 거다. 

트리위저드 시합은 진짜 봐도 봐도 거지같은 올림픽이다. 마법 세계에 이미 인명 경시 사상이 쩔게 깔려있다는 것은 어느정도 눈치채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않냐? 10대 청소년들 보고 입에서 불 뿜어대는 집채만한 야생동물이랑 맞짱 뜨라고 하지를 않나, 도전 과제이자 트로피 만든 답시고 친구들 잡아다가 호수 밑바닥에 꽁쳐두고... 심지어는 <샤이닝> 마냥 미로에 싹 다 몰아넣고 지들끼리 줘패라고 함. 진짜 이건 미친 거 아니냐? 셋 중에 하나만 해도 현실세계에서는 학대 및 방조로 잡아갈 판인데. 용기를 시험하고 말고 나발이고 이딴 시합은 좀 없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 현실성과는 별개로 볼거리는 나름 있는 편. 특히 용과 싸우는 첫번째 시험이 재미있다. 문제는 갈수록 각 단계의 임팩트가 떨어진다는 것. 특히 마지막 단계인 미로 게임은 그 긴장감이나 디자인이 형편없다. 물론 바로 직후에 '볼드모트' 부활 쑈가 있어서 미로 장면을 어쩔 수 없이 축소해야한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러나 축소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성의가 없어보임. 미로 안에 뭐 다양한 트릭들 갖춰놓은 것도 아니고...

북유럽 마법학교인 덤스트랭과 프랑스 마법학교 보바통의 표현이 재미있다. 사실 이런 걸 좀 보고 싶었던 거거든. 각 나라와 그 문화권에 대한 유머 및 코멘트를 이 세계관에 맞춰 적절히 변형시키는 거. 과연 바이킹의 후손답게 덤스트랭 학생들은 오만방자하고 거칠다. 고상한 프랑스인인 보바통 학생들은 관능미가 흐르고. <신비한 동물들과 그린델왈드의 범죄>에서 그게 실망스러웠던 거거든. 미국과 프랑스 마법부 다 보여주면서 그 묘사는 영국 마법부랑 하등 차이 없었던 거.

앞서 말했듯 무도회 시퀀스는 그 리듬과 흐름이 쾌활해 좋다. 이런 풋풋한 장면 이 시리즈에서 처음 보는 것이기도 했고. 주인공들이 어느정도 컸기 때문에 이런 장면도 가능했으리라고 본다. 그야말로 마이크 뉴웰의 연출자적 면모가 제대로 뽑혀나온 그런 시퀀스.

볼드모트가 드디어 부활했다. 남 뒷통수 전세 냈던 시절에 비하면 격세지감. 본격적으로 첫 등장하게 된 대마왕인데, 캐스팅이 무려 랄프 파인즈. 근데 다시 보니, 랄프 파인즈 정도의 명배우 아니었다면 이래저래 웃기기만 했을 것 같은 캐릭터다. 특유의 쇼맨십이나 자뻑이 심한 캐릭터라 자칫 잘못하면 오그라들기 십상이었을 텐데, 랄프 파인즈가 진짜 잘 살려냈다. 뱀 같은 외형을 위해 코를 깎아낸 디자인과 그걸 뒷받침하는 CGI도 훌륭했고. 특히 검은 연기가 그의 몸을 두르며 로브로 변하는 묘사는 그야말로 백미.

바티 크라우치 2세 관련해 '무디'와 엮여있는 핵심 미스테리가 좀 약하다는 평을 듣는데, 개인적으로는 그만하면 됐지 싶다. 트리위저드 시합이라는 간판 매치와 볼드모트 부활이라는 간판 쑈가 이미 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스테리는 이 정도로 조율하는 게 최선이었을 것 같기도 하고. 짧게 나오지만 데이비드 테넌트가 진짜 열심히 연기하고 있기도 하고... 다만 앞서 말했던 도비와 마찬가지로 이 양반도 이후 시리즈들에 잠깐이나마 또 나왔으면 어땠을까 싶음. 지금은 너무 일회용 캐릭터처럼만 취급되는 느낌이라.

주인공 3인방의 연기도 좋고 여전히 마이클 갬본의 '덤블도어'도 좋은데, 이상하게 제일 좋은 연기는 케드릭 디고리의 아빠가 가져간다. 아들의 신체를 부여잡고 허공을 향해 소리 지르던 그 쇼트의 연기가 현실적인 동시에 연극적인 비극처럼 느껴져서 좋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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