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돈 치들 얼굴을 한 신적 존재의 성탄맞이용 평행우주 장난질.
평행우주를 다루거나 대체 역사를 주 소재로 삼는 이야기들의 가장 큰 원동력은 당연히 '만약에...'다. '만약에...' 만약에. '만약에'라니. 이쪽 계열에서는 만약 베트남전에서 미국이 승리했다면?-이나, 만약 조선이 일본의 식민 지배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면?- 따위의 비장하고 거창한 이야기들로 쉽게 빠져버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런 선택의 순간들은 우리네 삶 속 가장 미시적인 순간들에도 존재하고, 바로 그 때문에 여전히 과거에 묶여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는 몇몇의 우리들이 현실에서 역시 존재한다. 우리가 삶을 살아가면서 거치는 거의 모든 고민과 걱정들의 뿌리가 되어주는 말. 내가 살아보지 않은, 또는 살아보지 못한 시간들과 그 선택들에 대한 질투 내지는 후회로써 작용하는 말. 만약에, 내가 그 때 그녀와 헤어지지 않았더라면?
고급 펜트하우스에 명품으로 꽉찬 옷장, 깔끔하게 잘 빠진 페라리, 그리고 '사장'이라는 직책까지. 그 어느 것 하나 남 부러울 것 없는 '잭'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라는 점은 그래서 특이하다. 보통은 지금 상태에 만족하지 못한채 후회의 어느 한 구석에서 구물거리고 있을 인간이 주인공이어야 맞는 이야기잖아. 근데 잭은 진짜 말그대로 남 부러울 게 하나도 없는 인간이라고. 단 하나도. 북적거리는 가족 없이 홀로 성탄절을 맞이해야해서 그 외로움에 몸서리치고 있는 듯한 묘사 따위도 하나 없다고. 바로 이 점 때문에 영화가 값지면서도, 또 필요 없다며 한사코 거절하는 나에게 그 가격 그대로 강매 하려는 듯한 느낌을 줘서 미묘 하게만 느껴진다.
일단 값진 점. 이야기의 포인트가 노골적이진 않다는 것. 우리가 특정 과거 속 특정 분기점에 대한 특정 선택의 기회 비용을 질투하게 되는 경우보다, 오히려 우리가 인지 하지도 못하고 지나친 수많은 선택들 속에 진정한 행복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 그러니까 <패밀리 맨>의 태도는 "지금 당신이 후회하고 있는 과거의 그 순간보다 사실 더 중요했던 것은 당신이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어느 순간이었다"에 더 가까워보인다. 그리고 실제 우리네 삶 역시 그래보이지 않는가. 인간은 미래 앞으로 벌어질 운명과 앞으로 맺어질 인연들을 기대하는 습관이 있다. 그 습관에 비추어 역산해보면, 우리의 과거 속에도 벌어질 수 있었던 운명과 맺어질 수 있었던 인연들이 이미 존재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각자의 운명과 인연들은 여러 다른 갈래의 큰 인생 이야기들로 퍼져 나갔겠지. 그 큰 이야기들 중 하나를 우리가 이미 선택한 거고. 그런 포인트에서 본다면 <패밀리 맨>의 교훈 포인트는 노골적이지 않다.
여기에 영화가 내게 강매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유. 성탄절을 배경으로한 가족 영화라는 것도 잘 알겠고, 이 영화가 제작되기 한참 전의 시점부터 지금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한참 후의 시점까지도 여전히 전세계 영화계에서 그 가족 영화적 트렌드가 잘 먹힌다는 것 역시도 알겠다. 그러나 영화가 그 노골적이지만은 않던 교훈을 내게 전달하려던 태도가 노골적이라 거부감이 들었다. 상술했듯, 잭은 자신의 현재 인생에 별다른 불만이 없었다. 지금 잘 살고 있었고, 묘사되는 그의 직장내 능력으로 보아 앞으로도 그럴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현재 자신의 인생에 분명히 만족 중이었다고. 전 애인의 안부 따위도 별로 궁금하지 않았었다고. 그런데도 영화 속 신은 그의 귀로 느닷없는 가족 영화적 교훈을 속사포 랩처럼 때려박아댄다. '너 연휴에도 혼자라 외롭지? 아무도 널 반겨주지 않아 힘들지? 위로받을 곳 없어 괴롭지? 그 때 그 여자 생각나 죽겠지? 누구나 다 하나쯤은 갖고 있는 그 근사한 가족 너도 있었으면 좋겠지?' 근데 씨팔, 세상 인구가 이제 70억이라는데 그 70억 명 다 가족에 대한 가치관이 소련 마냥 똑같겠냐고. 어떤 사람은 가족 없이 홀로 지내는 거 좋아할 수도 있지. 또 어떤 사람은 평생 한 배우자랑 진지하게 사는 것보다 그냥 섹스 파트너 하나 꾸려서 가볍게 즐기는 걸 더 좋아할 수도 있는 거지. 그리고 다른 어떤 사람은 아이들 별로 안 좋아할 수도 있는 거고. 허나 그딴 것 없이 돈 치들 얼굴을 한 이 세계의 신은 모두에게 똑같은 가족적 가치관을 설파한다. 아니, 강요한다. 이거 하는 짓 보니 그냥 파쇼구만.
과거의 그 여자 그리워하고 있지도 않은 남자에게 뜬금없이 찾아가 '너가 모르는 가족의 소중함' 한 번 느껴보라고 강요하는 영화. 그 자체로 따뜻하고, 배우들의 호연이 인상적이며, 맥빠지는 클라이막스 빼고는 사실 영화적으로 별 단점 크게 없는 영화이기도 한데. 그냥 영화의 그 일방적인 태도가 싫었다. 이쯤 되면 '가족'이라는 이름의 신성한 제단이라고 불러야 하는 건가.
뱀발 - 근데 <소스 코드>나 최근 <원더우먼 1984> 보면서도 들었던 생각인데, 이게 만약 진짜 평행우주 설정이라면 '케이트'와 헤어지지 않는 삶을 살고 있던 그 다른 잭의 영혼과 정신은 어디로 가 있던 것일까? 화려한 싱글 잭의 몸뚱아리에서 지냈던 것일까? 만일 그랬다면... 10여년을 유부남으로 지내다 펜트하우스 주소를 가진 성공한 싱글남으로서 살 수 있었던 그의 2주... 그 2주 갖고 싶다.
덧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