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1/28 16:41

데블, 2010 대여점 (구작)


운명론에는 언제나 절대자의 입김이 깃들어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당신이 신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은 곧 악마의 존재를 믿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이 관여한 것 외의 몇몇 운명론적 이야기는 악마의 주관일 수도 있다는 것. 


열려라, 스포 천국!


정말 다행인 것은, 제목과 포스터를 비롯한 여러 마케팅 포인트에서 영화의 장르가 오컬트임을 명명백백히 밝히고 있었다는 부분이다. 진짜 악마가 존재하고 또 등장한다는 걸 내가 알고 봐서 정말 다행이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그저 이 영화를 기이한 분위기의 밀실 살인극으로 보기 시작했을 것이고, 그러다보면 결국 초자연적이고 비현실적인 영화의 전개와 결말에 필시 실망했을 거다. 그러니까 오컬트 장르이기 때문에, 진짜 범인이 누구인지를 밝혀가는 데에 있어서 추리적 요소는 배제하는 게 나은 편. 뒤섞여있는 여러 힌트들을 논리적으로 재조립해 추리하는 과정이 사실 별로 의미가 없는 영화란 소리다. 어차피 범인은 초능력을 가진 악마니까. 물론 그렇다고해서 그 악마의 존재와 정체에 대해 아예 힌트가 없는 것은 또 아니지만.

그새 <베리드>와 <서치> 같은 영화들에 길들여졌던 것인지, 엘리베이터 안에 갇힌 다섯 사람의 이야기라길래 카메라가 그 바깥으로 나갈 일 없을 줄 알았다. 영화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한계가 더 타이트할 줄 알았던 거지. 그런데 영화는 공중에 붕뜬채로 멈춰진 엘리베이터 내부와 그들을 구하려는 바깥 세상 속 한 형사의 시점을 바쁘게 오간다. 그래서 보는내내 궁금했다. 왜 굳이 이 형사의 서사를 집어넣은 것일까. 엘리베이터 안에서의 일을 더 길게 뽑아 묘사해도 더 그럴듯 했을 텐데. 그렇게 궁금증을 한껏 안고 보았는데, 결말까지 보니 결국 이 이야기 구조는 운명론 그 자체로 모든 걸 엮기 위해서였다. 

밥과 나물, 육회 등을 비벼다가 비빔밥 만드는 것처럼 엘리베이터 내부의 다섯 사람은 곧 비벼질 존재로서 악마에 의해 셋팅된다. 그리고 그 완성된 비빔밥 위에 올려지는 달걀 프라이의 역할이 바로 주인공 형사의 것. 다섯 사람의 서로에 대한 의심과 갈등이 이 영화의 장르적 쾌감을 충족시켜주고 있고, 마지막 형사의 이야기로써 모든 것이 다 실처럼 묶이게 되는 결말은 오컬트라는 장르의 핵심 메시지를 직구 자세로 던져낸다. 사필귀정이라고 했던가. 아니면 더 짧은 단어로 업보라 했던가. 과거에 선택했던 행동들이 부메랑이 되어 그들에게 고스란히 돌아오는 과정. 영화는 그걸 악마의 존재를 대놓고 드러냄으로써 더 강조한다. 

그러니까 결말이 마음에 드는 것이다. 사실 차라리 오컬트적인 요소 싹 걷어내고 그냥 본격 밀실 살인극으로만 갔으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그럼에도 스릴러적 요소와 오컬트적 전개를 섞어내 콤팩트한 모던 오컬트 영화로 나름의 특이한 매력과 맛을 구현해냈다는 것이 맘에 드는 점. 사실 이런 영화 잘 없잖아. 오컬트면 시대적 배경이 중세 유럽처럼 과거인 경우가 많고, 그게 아닌 현대 배경이라 할지라도 보통은 시골 마을이나 한 집 내부에서만 전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이렇게 대도시 한가운데의 고층 빌딩 속 엘리베이터를 배경으로 삼으면서도 굳이 오컬트라는 요소를 나름 붙여냈다는 게 색다름.

근데 그런 매력을 갖고 있음에도 이상하리만큼 형편없게 연출된 부분들이 없지 않다. 잼 바른 토스트 떨어뜨리는 것으로 악마의 존재를 설명하는 경비원 캐릭터의 존재라든가, 나쁜 짓 일삼은 인간들을 벌하러 온 것 치고는 선량한 인간들 역시 많이 죽게 만드는 악마의 괴상한 룰이라든가... 아, 특히 에필로그라고 할 수 있을 결말도 그렇지. 갑자기 교훈적으로 매듭 지으려는 듯한 강박이 보이는 것 같아 좀 부담스러웠다.

하여튼 범인이 악마이다 보니 어떻게 추리해도 맞출 수가 없는 것 역시 단점. 목 졸려 죽은 할머니가 악마였던 걸 대체 어떻게 맞추냐고. 이미 죽은 것처럼 다 해놓고... 어휴, 스릴러와 오컬트가 섞여서 나름의 맛은 생겼는데 또 어떻게 보면 두 장르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느라 애매해진 것 같다는 인상도 여전하다.

덧글

  • SAGA 2021/01/28 23:08 # 답글

    악마가 범인인 걸 보고 깊은 한숨을 쉬었죠. 나름 범인 맞추려고 머리 굴리고 있었는데... 좀 허무했다고 할까요? 그랬습니다.
  • CINEKOON 2021/01/31 16:13 #

    바로 그 점 때문에, 미리 오컬트 영화라는 걸 알고 감상한 게 다행이었습니다. 배신감이 좀 덜 들더라고요
  • 로그온티어 2021/05/17 01:10 # 삭제 답글

    이 영화를 본 지 오래되서 지금 제대로 된 감상을 쓰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만, 그럼에도 추억삼아(?) 써보자면, 저는 매우 즐겁게 봤습니다. 언급하셨듯이 이미 이 작품은 오컬트이고, 제목부터 데블이고(...) 점등된 30초안에 살인을 저지르는 건 초인적인 힘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니, "누가 범인이냐"라는 촛점은 사실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는 것을 짐작했거든요. 저는 극장가서 봤었는데 이 영화가 80분이라는 사실을 잊었을 정도로 재밌게 봤습니다. 지루하면 짧은 시간도 길게 느껴질 때가 많아서 비꼬는 말처럼 들리지만, 비꼬는 말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긴장을 크게 느끼면 짧은 시간이 길게 느껴질 때가 있잖아요. 때문에 저는 이 영화를 매우 긴장감 넘치게 본 것입니다(...)

    [파이널 데스티네이션]과 비슷한 맥락으로 보았습니다. 죽음을 피한 자가 죽음을 피할 수 없듯, 크고 작든 죄를 지은 자들은 그 댓가를 피할 수 없다라는 맥락을 즐겼습니다. 다음은 어떻게 될까? 살기 위해 무슨 짓을 할까? 그런 부분을 보았던 겁니다. 그러니까, 밀실살인물이라기 보다는 큐브와 비슷한 작품으로 봤어요. 큐브와 달리, 이 작품에서는 크든 작든 다들 죽을 만한 동기는 있으니 (무고하진 않으니) 주인공들이 죽어도 딱히 짜증나지도 않기도 하고요.

    작중 배경인 엘리베이터는 일상적인 공간이기도 하지만 만남과 무심함이 가득한 공간이기도 한데요. 엘리베이터를 사람들과 함께 타면 그 사람과의 거리는 좁아지지만 관심도는 조금도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저 잠깐 스쳤다 사라질 사람들이니까요.

    그리고 엘리베이터에 동승한 사람들이 어떤 사람일지는 모르죠. 그 내면에 악마가 있을 지. 범죄자가 있을 지는 모르는 겁니다. 서로 속을 툭 터놓기 전까진. 제 생각에 각본가는 그걸 의도했던 것 같아요. 평범해 보이지만 그 속에 있을 악마는 그 누구도 모른다는 것 말입니다. 그리고 그 악마가 가까이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도요. 그것도 좁은 공간에 같이 있다면? ...그런 소름을 유발하려고 했던 것인 것 같은데, "그렇다면 그 의도가 잘 전달된 것일까?"

    그런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눈 앞에 있는 상대가 무엇인지 끝까지 알 수 없었기에 유지되는 긴장감이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문제의 정답을 맞추는 것 보단, 문제를 푸는 긴장감을 유발하는 게 이 영화의 재미포인트였다고 생각합니다. 위에 썼듯이 그런 긴장감이 팽팽했기에, 어느정도는 이 영화가 목적은 달성했다고 생각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요.

    잼바른 토스트는 제 생각에, 개그 속에 슬쩍 섞은 헷갈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저 안에 악마가 있는 건 다 알아요. 다만, 이렇게 어이없는 판정법을 슬쩍 흘림으로써 웃음으로 긴장을 살짝 해소하면서 일말의 헷갈림을 유도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오히려 그게 좋았어요. 그거 한 경비원 캐릭터가 꽤 귀엽기도 했고 (?)

    마지막으로, 이 영화를 감독한 존 에릭 도들은 은근히 악마와 죄의식에 대한 테마를 즐겨 쓰는 감독인 것 같아요. 후속인 As above so below도 비슷한 주제를 펼치니까요. (스포일러라서 쓰기 어렵습니다만)

    저는 그래서 존 에릭 도들 작품의 평이 어찌되었건 이 분의 작품을 좋아했었습니다. 누구나 저지른 죄악도 있고, 그에 대한 댓가가 벌어지는데, 그 댓가가 매우 끔찍해서, "내게도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라는 공포를 슬쩍 느끼게 해주는 게 좋았어요. 말했듯이, 누구든지 크게든 작게든 잘못을 저지르니까요. 지금은 몰래 넘어갔겠지만 내일 혹은 어느 순간 그 지옥의 엘리베이터를 타버리게 될 지는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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