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전에 내가 어릴 적,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기 이전의 아빠가 화를 내며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피가 섞인 가족이 이렇게 서로 달라서야 되겠냐"고. 성인이 된 지금이야 당시의 아빠 심정을 어렴풋하게나마 이해하지만, 어렸던 그 당시엔 그러질 못했으니까. 그래서 당시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가족이라해도 일단은 다 다른 사람들 아닌가? 그럼에도 가족이니까 함께하는 거지, 가족이기 때문에 무조건 같은 마음이여야 한다는 것은 너무 다크사이드 같은 주장 같은데.' 물론 그 생각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진 못했었고.
<세자매>는 바로 그 점에 집중한다. 가족이라 소중해- 따위의 동화같은 면모로 세자매를 먼저 소개하는 영화가 아니다. <세자매>는 우선 그 세자매가 얼마나 다 다른 사람들인가-를 먼저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장녀이자 맏이로서 언제나 미안하다 말하고 울분을 속으로 삭히는 첫째. 완벽한 것처럼 보이려 하지만 실상은 오히려 그 때문에 안에서부터 무너져 내려가는 둘째.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지나친 솔직함이란 이름의 철퇴를 주위에 휘두르며 술에 절어 사는 셋째. 아, 그리고 '세자매'라는 타이틀에는 끼지 못하지만 그만큼 아픈 기억으로 현재의 삶을 버텨가는 막내 남동생까지. 영화는 이 각자의 인물들을 처음부터 한 프레임 내에 다 들여놓질 않는다. 첫째와 둘째, 그리고 셋째는 각자의 프레임과 각자의 씬에서만 존재하며 심지어 막내 남동생은 마지막까지 얼굴을 보이지 않고 철저히 대사로써만 그 존재를 드러낸다. 같은 가족이지만 서로 다른 사람들. 영화의 프레이밍이 그걸 의미하는 것 같았다.
인물들을 첫 소개하는 방식에 있어서 카메라의 위치 역시 흥미롭다. 그들은 모두 뒷통수, 뒷모습만을 관객들에게 보이며 영화 안으로 들어온다. 그들의 지금 감정과 지금 기분을 드러내는 정면으로써의 클로즈업이 아니라, 그들이 지금 향하고 있는 방향과 그 위치를 먼저 보여주는 후면으로써의 클로즈업. 첫째는 암을 품고 병원에, 둘째는 믿음을 품으려 교회에, 셋째는 결국 술의 품으로. 아, 계속 빼먹는데 막내 남동생도 이야기해야지. 그 역시 첫등장은 뒷모습이며, 그는 누군가에게 오줌을 싸갈기러 향하는 중이다. 그렇게 그들 모두는 어딘가로 향하는 모습을 통해 자신의 현재 위치를 관객들에게 인지시킨다.
이렇게 각자의 시간과 각자의 상황, 각자의 위치 속에 머물며 서로 다른 면모를 띄워내던 그들은 영화가 진행될수록 누가 가족 아니랄까봐 서로 엮이게 된다. 단순히 같은 씬으로써 엮인다는 말만은 아니다. 물론 따로따로 나오던 그녀들이 한 프레임 안에 함께 존재하게 되는 장면들도 있기는 하지. 그러나 내가 말하는 건 가족으로서 엮인다는 점이다. 그냥 일상적인 드라마로도 풀 수 있었던 것을, 감독은 굳이 폭력의 사슬과 시뻘건 피의 이미지로 강조 해낸다. 그리고 그를 통해 이 세 여자가 한 가족으로 묶이게 된다. 그러니까 서로 다른 것처럼 보였지만 이들은 같은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철천지원수 같던 아빠의 폭력이, 마치 유전처럼 내려와 그녀들에게서 반복되는 모양새. 첫째는 자신을 다치게 하고 둘째는 상간녀의 얼굴에 발길질을 하며, 셋째는 그 무게가 좀 더 가벼울지언정 어쨌거나 남편을 팬다. 그리고 그건 넷째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리고 이 모든 일에도 끝내 사과하지 않은채 자해라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면죄부를 습득하는 가부장의 모습까지. 반복되는 피의 이미지와 그로부터 거듭 드러나는 폭력성. 서로의 이른바 '그런 점'들 때문에 각자를 미워했지만, 사실은 모두 '그런 점'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것. 어쩔 수 없는 가족이라는 것. 그 말이 희망처럼 느껴지는 동시에 깊은 절망을 함께 수반하는 것만 같아 어지러웠다.
근데 또 생각해보면 스스로 제시하고 있는 그 무엇 하나 속 시원하게 해결해주는 영화가 아니기도 하다. 결국 첫째가 죽는 광경을 보여주는 것으로 가족의 재화합을 도모하고 있지도 않고, 둘째의 이혼 성공 여부나 부모로서 각성하는 셋째의 모습 역시 단 한 줌도 묘사되지 않는다. 때문에 어떻게 보면 좀 답답할 수도 있다. 허나 한 번 더 생각해보면, 가족이라는 게 그렇지 않나. 어딜가나 끝은 없고 그냥 그렇게 살아가게 되는 존재이질 않나. 그런 면에서 영화의 결말 역시 일정부분 이해된다.
김선영이 묵직하고 문소리가 날래며, 비교적 기대치가 적었던 장윤주의 연기마저 훌륭하다. 여기에 조한철이나 김가희, 현봉철의 연기 또한 좋다. 심지어는 카메오로 잠시 나오는 김의성도 강력해. 그러니까 배우들의 연기 보는 맛 하나는 보장할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아직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왜 어릴 땐 좀 더 적극적으로 부모에게 대들지 못했을까. 아니, 말하지 못했을까. 말이 '대든다'이지, 사실 그냥 내 주장 내 의견 이야기하는 것이었을 텐데. 근데 또 무서운 게, 이 영화의 결말처럼 나 역시도 요즘 그 가족의 유전적 형질에 대해 놀랄 때가 있다는 것이다. 내가 듣기 싫었던 말과 보기 싫었던 행동이 무의식적으로 내게서 튀어나오는 상황이 요즘 부쩍 많이 생겼다. 이래서 가족이라는 건가. '가족'이라니. 정말로, 여러 의미에서 지겹고 찐덕하고 가볍고 밝은 단어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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