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02 13:41

볼드모트 악당찬가


장장 여덟편에 달하는 프랜차이즈 영화에서 내내 엄청난 존재감을 과시했던 대마왕. 정말 대단한 건, 대마왕 캐릭터들이 으레 그렇듯 본인의 명예를 과시하고 또 과시하다가 끝내는 그 이름을 부르는 것마저 공포의 대상이 되어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될 자'라는 타이틀까지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전범 낙인이 찍혀 사회적 + 역사적으로 매장당한 거라 볼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마법 세계의 그 누구나 이 대마왕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을 경계하고 또 무서워하니까. 심지어 1편에서 해그리드는 이 인간 이름 네 글자 부를 때 벌벌 떨고 앉아있더라. 


추종자 무리의 네이밍 센스도 적당히 간지나는 동시에 좀 유치한데, 다름 아닌 '죽음을 먹는 자'. <스타워즈>의 제국군이 그랬듯, 모티프는 역시 제 3제국. 애당초 볼드모트 자체가 아돌프 히틀러의 유사 이미지다. 영국, 그러니까 유럽을 주무대로 암약했으며 혈통 관련 정책을 세우고 소위 잡종이라 불리우는 혼혈들을 싸그리 잡아다가 학살. 거기에 사망 이후에는 끔찍한 전범으로 낙인 찍혀 사람들이 쉬쉬하는 신세. 그와중 살아남은 전범들이나 네오 나치들처럼 사회 곳곳에 섞여 비밀스레 활동을 이어나가는 죽음을 먹는 자들 역시 딱 이미지가 그 쪽 모양새다. 


아 씨발 깜짝야

일단 대단한 점. 시리즈 편수가 여덟편이나 되는데 꼭 매편마다 나온 것도 아니었지만 하여튼 간에 존재감 하나는 제대로였다는 점. 그만큼 근성 하나는 알아줘야 하는 대마왕이었다. 우리의 대마왕께서는 살아 생전에도 삶에 대한 집착이 어마무시한 양반이었기 때문에, 죽음 아닌 죽음 이후에도 부활하기 위해서라면 모든 술수를 다 썼다. 심지어는 한참 아래 짬밥일 부하의 뒷통수에까지 기생하는 모습으로 시리즈에서 제대로된 첫 등장을. 얼마나 다시 살고 싶었으면... 하긴, 볼드모트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존나 억울했을 것 같기도 하다. 웬만한 마법 세계 고수들과 오러들 한 방에 다 때려잡고 세계 정복 완성하는 것도 거의 다 끝난 일이었는데, 웬 애 엄마랑 애 아빠 죽이려다가 무지개 반사 먹고 갑분싸로 영면했으니... 


확실히 능력 하나만 보면 탑급은 탑급이었던 듯 싶다. 시리즈 통틀어 제대로된 싸움을 보여주는 건 사실 <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 이거 딱 하나라고 봐야할 텐데, 그 짧은 씬의 임팩트가 세도 워낙 세서 그냥 대만족. 현존하는 마법사들 중 가장 강력한 마법사라며 후까시 잔뜩 잡아주던 덤블도어를 상대로 그 정도의 호각을 벌였으니...

근데 문제는...


문제...?

문제는 애초 그 사상과 계획이 유치했고, 멘탈 관리 역시 잘 안 됐다는 점에 있다. 물론 혼혈들 다 때려죽이고 순혈만의 세상을 만들자-라는 캐치프라이즈 자체가 존나 구시대적이고 촌스럽지. 근데 그걸 떠나서 봐도 전략가 타입은 아니었던 듯 싶다. 세상에 마상에 자기 명줄이 걸린 호크룩스를 몇 개나 만들어놨으면서도 특유의 그 유치한 명예욕과 과시욕 때문에 일을 다 그르쳤다. 내가 볼드모트였으면 평범한 조약돌 하나 주워다가 그거 호크룩스로 만들었을 거야. 그리고 그 조약돌 태평양이나 대서양 한 가운데에다 던져버렸을 거야. 그래야 못 찾지.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다 숨겨야지, 새끼야. 근데 얘는 누가봐도 존나 특별할 것만 같이 생긴 의미 깊은 물건들에다가만 자기 영혼 붙여놨다. 이 빡대가리야, 반려동물인 내기니는 그렇다쳐도 호그와트 창립자들을 각각 대표하는 보물들에다가 호크룩스 걸어놓으면 어떡해.


멘탈 관리도 오지게 안 된다. 호크룩스 하나씩 터져나갈 때마다 이상한 비명을 마구 질러댄다. 심지어 분에 못 이겨 자기 참모들도 마구잡이로 죽이고, 가장 지원이 필요할 때에 전투에서 벗어나기도 했다. 여기에 아이템에도 지나치게 집착해서 딱총나무 지팡이 하나만 보고 존나 닥돌하기도 하고...


나중엔 존나 웃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비열한 악당 웃음이 아니라 어딘가 짠한 호구의 웃음. 심지어 말포이한테도 약간 무시당하는 모양새라 존나 깼다. 물론 말포이도 두려워서 몸이 굳은 거겠지. 근데 상황이 상황이다보니 뭔가 스킨십 싫어하는 직장 후배에게 응원한답시고 포옹하는 부장님 같아 웃겼음.


그렇게 한 때는 대단한 카리스마를 과시했던 왕년의 대마왕도 결국 먼지가 되어 바스라지고야 만다. 사실 이미 많은 팬들이 놀려먹고 있기는 하지만, 세계 정복도 아니고 겨우 학교 하나 털어먹으려다 실패하고 거기 다니던 재학생에게 퇴물 취급 당한 케이스라 좀 병신같음. 진짜 랄프 파인즈의 연기 아니었으면 시리즈 후반부는 다 말아먹었을 거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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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ID U MISS ME ? : 더 디그 2021-02-07 16:04: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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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NRPU 2021/02/03 09:37 # 답글

    에헤헤~ 하는 웃음이라던가 말이죠
  • CINEKOON 2021/02/13 12:36 #

    그거 진짜 깨던데 말이죠
  • 로그온티어 2021/05/17 01:27 # 삭제 답글

    저는 오히려 이게 좋았다고 생각해요. 작품 속에 과장되어 묘사되는 사이코패스 캐릭터 때문에 현실 속 사이코패스들의 찌질함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듯이, 악역의 카리스마 때문에 악행이나 그 본질이 묻히는 상황들이 많았으니까요.

    실제로 현실속에서는, 악행을 저지른 역사 속 인물들의 행보나 문제 있는 신념들을 뻥튀기하는 사례들이 많기도 하잖아요. 연쇄살인마들을 향한 러브콜들이나 네오나치같은 것처럼. 수많은 부정들을 소문 속에서 보면 너무나도 무섭지만, 범죄분석전문가분들이 번번이 이야기하듯, 실제론 그렇지 않죠. 똑똑해서 이긴 것도 아니고, 단지 타인들이 신뢰하는 질서를 어겼기 때문에 악이 순간적으로만 이길 수 있었을 뿐인데.

    때문에 소문에 위축되지 말고 용기내어 부정과 맞서라는 이야기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 CINEKOON 2021/05/24 13:53 #

    그 표현 좋네요. '단지 타인들이 신뢰하는 질서를 어겼기 때문에 악이 순간적으로만 이길 수 있었을 뿐'이라는 문장요.

    비교적 최근의 어떤 성범죄자도 기자들 앞에 서서 자신에게 악마라는 타이틀 붙여가며 잔뜩 허세를 부렸었죠. 제 딴엔 조커나 베인 같은 영화 속 멋진 악역들처럼 보이겠지 싶었던 것 같지만 현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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