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04 12:45

어니스트 씨프 극장전 (신작)


다른 건 몰라도 제목 하나만큼은 참 잘 지었다. '정직한 도둑'이라니. <테이큰>의 수많은 아류작들 중 하나로만 보일 뿐인 리암 니슨표 액션 영화에서 제목이 '정직한 도둑'이면 일단 '신원불명'이나 '통근자' 따위의 제목을 가진 다른 영화들에 비해 좀 나은 편 아니냐고. 일단 궁금증을 자아내잖아. 

근데 진짜 딱 호기심 유발이라는 목표 하나만 잡고 지은 제목이란 게 드러난다. 일단 제목과 본편의 내용이 잘 호응 안 됨. 좋아, 제목이 '정직한 도둑'이면 일단 주인공이 왜 도둑질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나 어떻게 그리 잘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게 먼저 아니냐? 그리고 왜 그 도둑놈 주인공이 정직하단 타이틀을 가져야하는지에 대해서도 묘사해야하고. 그러나 영화는 거기서 대충이다. 일단 주인공이 은행 금고 따는 모습으로 시작되는 영화이기는 한데, 그 잠깐의 몇 쇼트 이후엔 도둑질 하는 장면 1도 안 나옴. 아, 물론 남의 자동차를 털거나 하기는 한다. 그러나 이놈은 그런 잡범이 아니라 6년동안 잡히지 않고 신출귀몰했던 은행강도라고... 은행 터는 장면 진짜 하나도 안 나온다니까.

그래도 일단 도둑이라는 건 알겠다. 그냥 좀도둑도 아니고 대도. 그럼 왜 정직한데? 이 인간이 사랑에 빠졌단다. 그래서 한화로 따지면 몇 십억 원이 넘을 모아온 돈들을 그냥 국가에 돌려주고 자수 하겠단다. 죄책감을 갖고 사랑하는 사람의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다고 한다. ......씨팔, 이게 말이 되냐고. 애당초 '사랑'이라는 감정이 여러모로 치트키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알지만, 영화 시작하고 10분도 안 되어 그 사랑 때문에 자수하겠다는 게 말이 되는 거냐고... 그렇다고 그 사랑 관계를 아주 심도 깊게 묘사한 것도 아닌데 말야.

몇 십억 원을 털어먹은 도둑놈이지만 그래도 나쁜 놈은 아니다-라고 영화가 내내 주인공을 변호한다. 근데 그게 영 신통치 않아 변호라기 보다는 그냥 변명에 가까워 보임. 뭐? 돈 떼먹힌 아버지가 자살한 것이 억울해 지가 직접 그 은행을 털었다고? 왐파 눈 퍼먹는 소리하고 앉아있네. 그럼 그 은행장은? 은행 직원들은? 그 은행으로 주거래하는 다른 이용자들은? 그렇다고 해서 로빈 후드나 임꺽정 마냥 털어먹은 그 돈을 가난한 자들에게 베푼 것도 또 아니잖아. 지가 사적으로 안 썼다 뿐이지 불법점유하고 있던 건 팩트인데. 그래놓고 이제와서 자수 하겠다고? '정직함'이라는 트로피를 따는데 이렇게만 하면 된다고? 그럼 이 세상 개나 소나 다 정직하지.

그래, 더 꼬투리 잡지는 않겠다. 그냥 제목과 영화의 세부 설정이 맘에 안 들어 그랬다. 이건 그만 까야지. 근데 다른 걸로도 깔 건 많아서 괜찮음. 일단 주인공이 너무 먼치킨이다. 투 머치 만능 재주꾼이랄까? 이 양반은 은행 터는 수법을 보니 관찰력과 계획성, 실행력도 좋은 것 같고 무엇보다 해병대 출신으로 여러 차례의 파병을 거치며 실전에도 능숙한 인물이다. 폭탄 해체를 주특기로 삼아서 역으로 사제 폭탄 만들기도 잘함. 여기에 사격 솜씨도 꽤 있는 것 같고, 왕년에 고담의 박쥐를 가르친 위인 아니랄까봐 닌자 마냥 사라지는 것도 곧잘 한다. 운전 실력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웃긴 건 이미 완벽한 이 남자가 심지어 정직하기까지 하다는 것이다. 아, 이건 꼬투리 그만 잡기로 했지. 알았어, 알았다고.

하여튼 주인공이 너무 완벽하다보니 영화에 긴장감이 붙질 않는다. 이야기의 동선은 오락가락인데 주인공은 카카로트에게 순간이동술이라도 배운 건지 뭔지 여기저기를 날래 오간다. 존나 허술하고 자기 자신 외의 다른 사람들을 위험하게 만드는 계획이지만 어쨌든 그게 다 먹히기도 하고. 이건 메인 악역으로 설정된 부패한 FBI 요원 두 명이 너무 허접하게 묘사되고 있다는 점과 융화되어 더욱 더 심각해진다. 악당들은 호구고, 주인공은 너무 쩔어. 액션 영화에서 이 모양 이 꼴이면 망하기 딱 좋은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액션이 없다. 요즘 영화들은 '액션'이라는 말의 정의를 잘 모르나 보다. 아니면 그 기준을 한없이 내려잡았든가. 덩달아 관객 수준도 내려잡은 것이겠지만. 어쨌거나 영화에 액션이라고 할 만한 게 없음. 진짜 예고편에 나온 게 다다. 그래, 그것도 용서해줄 수 있어. 액션 영화로 잘못 홍보된 스릴러 영화라고 생각하면 편하니까. 허나 적어도 클라이막스 만큼은 뭔가를 보장해줬어야 하는 거 아니냐? 너무 별 거 없이 끝나길래 그게 클라이막스고 결말인지도 몰랐잖아. 후반부 생각하니까 갑자기 또 빡치네.

그나마 이 영화에서 반가웠던 것은 나이든 얼굴로 오랜만에 다시 만난 로버트 패트릭의 모습이었다. 그마저도 광탈 크리 맞기는 하지만... 하, 이동진이 그랬었지. 모든 영화들은 저마다의 약속을 한다고. 초반부에 약속했던 것들을 후반부에 어떻게 지켜내느냐에 따라 그 영화에 대한 본인의 평가가 달라진다고. 그 점에서 보면 <어니스트 씨프>는 잘못된 약속을 했다. 하이스트 영화스러운 도둑질도 보여주고, 리암 니슨표 액션도 보여주고 다 할게!-라고 약속했던 것 같은데, 결말까지 다 보고나면 그 중에 지킨 건 하나도 없음. 이쯤 되면 정직한 게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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