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에 제작된 영화인데 우리나라에서는 2021년이 다 되어 개봉한 창고 영화 아닌 창고 영화. 뭐랄까, 중고 신인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하여튼 한국에서만 지각 개봉한 작품인지라 거의 1년 동안 예고편만 봤던 영화다. 문제는 그 1년을 예고편만으로 연명하고 또 워낙 훌륭한 작품이다-라는 소문을 여기저기서 먼저 접했는지라 그동안 기대치가 꽤 많이 점프했다는 점. 그래서 막상 본 영화는...
본론부터 먼저 던지고 보면, 일단 실망이다. 예고편만 놓고 봤을 때는 나를 매혹시킨 지점들이 분명 있었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건 다 영화의 촬영과 조명적 측면 때문이었던 것 같다. 채도가 낮고 착 가라앉은 듯한 느낌을 주는 톤 앤 매너와, 헤드룸을 넓게 잡는다든지 인물들이 대화하는 동안 그 후경에 갖가지 요소들을 첨가해넣어 일부러 불안정하고 산만한 프레임을 만들어낸다든지 하는 등의 방법으로 불안함을 더하는 촬영적 요소들은 잘 조율 되어 있는 것 같다.
문제는 이야기와 연출이다. 딱 잘라 말해 별 거 없는 이야기거든. 시한부 판정을 받은 가족 구성원에게 당신 곧 죽을지도 모른다-라고 차마 말할 수가 없어 온가족이 다 그 선의의 거짓말에 동참하는 이야기. 이런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숱하게 있었고 그와중에 여러 다른 버전들로 변주 되기도 해왔다. 시한부 판정 그 자체에 대해 거짓말하는 영화는 아니었지만 <굿바이 레닌>이나 그걸 한국적으로 번안했던 <간 큰 가족> 같은 경우가 그랬었지. 하여튼 이야기 자체는 뻔하단 소리. 그러나 뻔하다는 이야기는 달리 말하면 그만큼 또 잘 먹힌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누구나 가족은 있고, 그 가족을 떠나보낸 경험도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그럼 담담하게 정통적 요소로만 승부 봤어도 충분히 먹히는 영화였단 소리인데...
존나 웃긴 건 정면 승부하는 영화인 줄 알았는데 별 쓸데 없어 보이는 요소들을 마구잡이로 다 던져낸다는 것. 시한부 판정 받은 할머니와 주인공 손녀의 이야기로만 우직하게 갔어도 됐을 것을, 영화는 양념으로써만 존재해야 했을 가족 간의 불화와 중국/미국 사이의 문화와 가치관 차이, 사촌 동생의 결혼식에서 벌어지는 일들 등을 직접적으로 마구 섞어댄다. 심지어 이미 세상을 떠난것으로 묘사되는 주인공의 할아버지 이야기까지 다시 끌고 들어옴. 골든 글로브나 아카데미에서 좀 놀다왔다 하는 영화들은 보통 일반 관객 입장에서 봤을 때 텅텅 비어보일 정도로 여백의 미가 강조되는 경우가 많은데, 어째 이 영화는 산만하다 못해 난잡한 인상이다. 그냥 할머니랑 껴안고 있는 주인공 모습만 봐도 눈물날텐데 거기다가 시끌벅적한 사촌 동생 결혼식 끼어넣고, 웃으라고 유머 요소로써 넣은 건지 아니면 중국 전통 문화 자학인지 구분이 잘 안 되는 공동묘지 헤드벵잉 절하는 장면도 생뚱맞게 들어있음. 그러다보니 영화 보는내내 그냥 심드렁해지더라. 심지어는 영화 언제 끝나는지 시계만 자꾸 쳐다보게 되고.
특히 중국과 미국 사이의 여러 차이들에 대한 코멘트가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영화이기도 한데, 다른 건 몰라도 대체 이건 왜 넣은 건지 여전히 아리송. 거의 두 시간에 달하는 영화에서 미국을 배경으로 한 장면이라고 해봤자 몇 개가 다고 나머지 대부분은 다 중국 본토에서만 이야기가 벌어지는데 굳이 중국과 미국을 계속 비교하는 이유는? 감독인 룰루 왕이 중국계 미국인으로 살면서 맞닥뜨렸을 여러 상황과 고민들을 억지로 밀어넣은 느낌이었다. 물론 그거 좋은 소재지. 근데 이 영화가 다룰 만한 주제는 아닌 거잖아.
꽤 오랜 시간에 걸쳐 기대감 쌓아놨던 영화인데 정작 관람하고나니 그냥 미지근한 영화였을 뿐이라는 데에서 오는 실망감. 그나마 아콰피나의 멍한 표정 연기는 일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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