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워> 처음 봤을 때의 느낌이다. 아, 오해 사기는 싫어. <승리호>는 <디워>보다 몇갑절은 더 훌륭하고 더 잘 만든 영화다. 그 점을 부인할 수는 없다. 다만 내가 <디워>를 떠올릴 수 밖에 없었던 지점은 <승리호>가 산업적 측면에서 봤을 땐 더할나위 없이 훌륭한 의미를 갖는 영화인 게 사실이지만, 조금 더 냉정하고 객관적인 잣대를 굳이 들이밀어 보았을 때는 분명 단점이 더 큰 영화처럼 느껴졌다는 데에 있다. 그러니까 좀 더 쉽게 말하면 난 <승리호>에 실망한 구석이 더 많고 이 글에서도 장점보다 단점을 더 많이 말할 테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가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일체 부정할 마음이 없다는 소리가 되겠다.
먼저 CGI를 비롯한 특수효과. 정말 이 정도까지 기대하진 않았었는데 더할나위 없이 훌륭했다. 아니, 물론 할리우드의 특A급 블록버스터 영화들에 비하면 아직은 걸음마 단계인 거 맞지. 그러나 240억원 정도로 추산되는 제작비로 이 정도 퀄리티를 뽑아냈다는 점이 특기할만하다. 그 자체로 완성도가 높은데 가성비까지 좋아. 물론 그 가성비라는 단어로 갈아넣어진 누군가의 인력과 노력들을 생각 안 할 수는 없겠지만 어쨌든 간에 대단하다. 이건 정말이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더불어 상황이 좀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아직까진 장르 영화 불모지로 여겨지는 대한민국에서 이 정도 기획을 실현 시켰다는 것 역시 여러모로 존경스럽고.
다만 일차적으로 프로덕션 디자인의 문제가 있다. 그러니까 그림 그리는 실력도 이제는 뛰어나고 그 그림 그릴 수 있게 손에 쥐어준 크레파스나 물감도 그 질이 훌륭한데, 무엇을 어떻게 그릴 것인지에 대해서는 좀 아쉽다는 거다. 일단 레퍼런스들이 노골적으로 보인다. 황폐화된 지구의 모습을 보며 <블레이드 러너 2049>와 <인터스텔라>를 떠올리지 않기란 어렵고, 지구 표면에서 우주 공간으로 도약하는 거대 엘리베이터의 모습에서는 렌 와이즈먼의 <토탈 리콜> 속 그것이 선명하게 아른 거리며, 빈부격차를 표현한 주거지역 디자인에서는 <엘리시움>, 기동대의 외양은 <채피>, 조선소는 <유랑지구>, 후반부 방송을 통한 연대의 이미지는 <캡틴 아메리카 - 윈터 솔져>와 <뺑반>, 그리고 어쩔 수 없게도 우주 공간에서의 모든 장면들에선 <스타워즈>, <스타트렉>,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가 겹쳐보인다. 그냥 참고한 정도가 아니고, 세부적인 디테일까지 홀랑 가져온 듯한 느낌이 든다고.
그러나 그 말을 꼭 해야할 것 같다. 독창성? 중요하지. 허나 장르 영화에서는 그 부족함이 어느 정도 용인된다. <백두산> 이야기했을 때와 달라 장르 편애 아니냐는 소리를 들을 지도 모르겠지만, 원래 첫 도전과 그 도약에는 밑그림이 필요한 법 아니겠는가. 쌓아온 게 없는데 그냥 무대포로 만들 수만은 없는 거잖아. <백두산>이야 이야기부터 장르까지 다 뻔한 작품이었으니 더 밉기만 했던 거고. 고로 이런 디자인적 아쉬움에 마냥 반기를 들 수 만은 없었다. 더불어 앞서 말했던 것처럼 CGI를 비롯한 구현력 자체의 레벨이 기대치 이상으로 훨씬 높기도 했고.
하지만.
이야기와 캐릭터를 빚는 데에 실패한 것만큼은 꼭 이야기 해야겠다. 장면과 묘사가 뻔했던 것만큼 이야기 역시 그럴 수 있는 거 아니냐고? 물론 맞다. 치유의 에너지를 지닌 어린 소년 혹은 소녀를 부유한 독재 세력들로부터 지켜내는 이야기, 존나 뻔하지. <엑스맨 - 최후의 전쟁>도 있고 곧 개봉할 <서복>도 그런 이야기 아닌가. 근데 이것도 다 넘어가 줄 수 있다고. 존나 뻔한 이야기지만 존나 그러려니 해줄 수 있다고. 그럼 최소한 뻔한 이야기를 하더라도 성의 있게는 해야할 거 아냐. 영화는 거기서 성의가 없어도 너무 없다.
신파는 괜찮다. 가족 영화니까 관객 좀 울려도 된다. 그러나 잘 해야지. 생각해보면 우리가 그토록 얕잡아 보기만 하던 요즈음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신파 요소는 더 세련되게 잘 하는 것 같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도 신파라면 신파 있지. 그러나 오프닝에 한 번 깔아 관객들 마음 열어놓고, 후반부에 엄마 손 잡아주는 주인공의 모습으로 열어놓은 관객들 마음을 비집고 들어가잖나. 그건 <스타트렉 - 더 비기닝>의 오프닝도, <제다이의 귀환> 속 다스 베이더의 변심 장면 역시 마찬가지다. 딱 그 정도 선을 유지하는 게 오히려 세련되어 보인다. 그에 비하면 <승리호>는 그냥 노골적이기만 하다. 난 자기 자신과 돈 밖에 모르는 인물로 묘사되길래 송중기의 김태호 캐릭터가 한 솔로나 스타로드 같은 쿨한 우주 악한 캐릭터인 줄 알았지. 허나 후까시만 오지게 잡더니, 결국 하는 건 또 눈물의 과거 회상이다.
물론 태호와 순이의 이야기는 의미 있다. 조심스럽긴 하지만 세월호 사건과도 결부되는 것처럼 보이고. 우리가 잃어버린 아이들에 대해 사과하는 이야기. 어른 세대로서 다음 세대에게 제대로된 용서를 구하는 이야기. 그 점에서 충분히 의미있는 설정이지만, 그걸 묘사하는 방식이 너무 촌스럽기만 하다. 과거 회상을 5분 넘도록 공들여 하고 있다, 이 영화가. 그것도 조성희 감독 특유의 뽀샤시한 조명으로. <부산행>에 나왔던 분유 광고 스타일 장면 같이. 여기에 직접적이라 오그라드는 대사는 덤. 자신의 과거 실수 때문에 청력을 잃게 된 소녀를 보며 한다는 말이, "나 때문이었어..."라는 혼잣말이라고? 그런 노골적인 대사 없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요즘 관객들이!
그래도 이렇게나마 태호에겐 드라마가 돌아간다. 반면 승리호의 선장 역할을 맡고 있는 장현숙은? 일단 이런 우주 떨거지들의 선장이라고 하면 관객으로서 호기심이 드는 게 사실이잖나. 그러나 영화는 그걸 잘 활용해내질 못한다. 이 인물이 왜 선장인지도 설득 못시키고 있음. 선장이면 능력을 보여줘야지. 전투원으로서 화려한 무공을 보여주든가, 아니면 전략가로서 꼼꼼한 지략을 보여주든가, 그것도 아니면 하다못해 울퉁불퉁한 승무원들을 하나의 팀으로 다져주는 리더십을 보여주든가. 영화는 장현숙에 대해 아무 것도 보여주지 못한다. 그냥 화투 치다 빡치면 판 엎어버리는 인물이라는 것 밖에 안 보여줌. 그나마 악당인 설리반과의 관계가 묘사 되고는 있는데, 그마저도 제대로 하지 않고 그냥 대충 설명하고 넘어가는 정도로만 표현되어 있다. 그러니까 그런 생각까지 들더라. 이 인물이 선장인 이유는... 자신의 롤을 줄여가면서까지 다른 승무원 캐릭터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큰 비중을 주려는 배려심 때문 아닐까 하는... 내 생각에 다른 인물들 비중 때문에 가장 손해본 캐릭터란 생각이 든다.
타이거 박은 조폭 두목 출신이란 한국적이라 재밌는 설정이 붙어있는데, 거창한 설정치고는 제대로된 액션을 보여주지 못한다. 그냥 조카 바보 느낌의 삼촌 캐릭터로서만 존재. 그나마 싸우는 장면 하나 있는데, 그것도 다른 승무원들에게 허세 떤 것에 비하면 쳐맞기만 하다가 그냥 기지 하나만으로 순식간에 이긴 거라... 이럴 거면 조폭 출신이란 설정은 왜 넣은 거야... 업동이는 감초로서만 보면 나쁘지 않다. 유해진의 연기도 찰떡이고, 모션 캡쳐로 추정되는 구현력 역시 으뜸. 그러나 굳이 여성향이라는 정체성까지 넣을 필요가 있었을까. 별로 재미없던데. 젠더 프리 묘사가 중요한 사이버펑크 장르 영화도 아닌데 말야. 그냥 김향기라는 특급 카메오의 자리를 위한 설정에 지나지 않았을지...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악당이다. 굳이 리차드 아미티지를 캐스팅해가면서까지 외국 배우들의 롤을 넣어야만 했을까? 굳이 전지구적이라는 이미지를 이렇게 다인종 캐스팅으로 이뤄내야만 했을까? 그냥 한국사람들만 나오는 로컬라이징 스페이스 오페라로만 갔어도 되었을 것을, 영화는 굳이 백인 남성 악당을 설정해 전지구적 세계관으로 무리하게 확장시킨다. 그리고 일단 이 인물도 재미가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 엘리트 지도자 느낌으로 처음 소개되는 순간부터 이 새끼가 나쁜 놈이구나 싶더라. 사실 영화 시작하고 5분도 안 되어 내가 향후 전개 다 맞추게 둔 것도 영화의 문제지만... 어쨌거나 이 악당은 헐크인지 지킬 박사인지 빡치면 핏대 올라오며 유독 잔인해지는 경향을 띄는데, 그것에 대한 일언반구의 설명도 없다. 거기에 허무한 최후는 덤. 사회적 위치로만 보면 대통령을 넘어 거의 독재자 수준의 권력을 가진 인물인데, 마지막 전투에 그렇게 직접 참여한다고? 떨거지들 몇 놈 잡으러 직접 전투기 몰고 출전하는 대통령이 세상에 어디있냐? 롤랜드 에머리히 : ????
아까 캐릭터 묘사와 더불어 이야기에도 성의가 없다고 말했었는데, 그 문제는 바로 인물들 간의 감정 묘사에 있다. 이합집산하고 오월동주하던 오합지졸 인물들이 한 아이를 통해 서로 끈끈이 결속하게 된다-라는 이야기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존나 뻔한 건 문제지만 그거 빼면 문제 없다고. 아니, 그러면 그 인물들 간의 관계 묘사는 좀 천천히 제대로 했어야지. 맨날 다투고 서로 헐뜯기만 하던 승리호의 멤버들은 꽃님이를 처음 만난 바로 그 씬에서부터 조금씩 따뜻하게 돌아서기 시작한다. 제일 큰 아쉬움은 타이거 박의 것. 이 인간은 꽃님이를 만난 바로 그 장면에서부터 꽃님이에게 따스한 눈길 날리기를 시전한다. 관계라는 게 좀 서로 대화를 통해 감정을 나누고 교류를 하다가 이어지고 또 붙어야 납득이 쉬운 건데, 이 영화는 그냥 아이 하나 덜렁 던져줘놓고 거기서부터 다 쉽게 해결됐다-라고 말하는 식이다. 여기에 결말까지 들먹이면, 꽃님이는 존재 자체로 그냥 데우스 엑스 마키나인 거고.
우주라는 한국 영화 사상 초유의 공간을 배경으로 삼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계급 격차와 갈등이라는 주제에만 고착화 되어 있는 것도 괜시리 아쉽고, 그마저도 다 뻔하게 묘사해 더 서글프다. 이기적이기만 하던 하류 인생들이 연대와 공생의 의미를 깨닫고 자본주의 거대 독재 세력에 맞선다는 이야기... 물론 좋지만 뻔하지... 연출이라도 잘했으면 모르겠지만.
SF, 그중에서도 특히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에 대한 애정이 워낙 큰 편이라 다른 영화 이야기할 때보다 좀 더 마구잡이로 헐뜯은 감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진짜 더 잘 됐으면 싶은 마음에서 더 앙칼지게 군 것... 어찌되었든 간에 장르 불모지인 대한민국에서 이 정도 규모의 스페이스 오페라 첫 신호탄이 쏘아 올려졌다는 것 자체에는 만족한다. 앞으로 더 다양한 장르 영화들이 계속 나왔으면 좋겠다.
뱀발 - 다른 건 다 그렇다치는데 그래도 우주선 이름을 제목으로 내건 영화면 그 디자인은 좀 더 신경 썼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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