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19 14:59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 언제나 그리고 영원히 극장전 (신작)


꽤 괜찮은 하이틴 로맨틱 코미디로 오랜만에 날 설레게 만들었던 1편. 그리고 높아져있던 기대치를 이말년 마냥 한 방에 와장창 무너뜨려 버렸던 2. 그 1편의 감독과 2편의 감독은 서로 다른 사람이었다. 그런데 시리즈의 마무리를 천명하고 돌아온 이번 3편의 감독이 2편의 바로 그 감독이라고 하네? 그럼 당연히 기대보다는 걱정이 더 되는 게 사실이잖아. 그런데 2편의 감독이었던 마이클 피모그나리도 그 1년 사이에 욕을 깨나 먹었던 모양이다. 뭔가 절치부심 해서 돌아온 느낌. 그렇다, 3편은 2편보다 훨씬 나은 작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한국 관객들이라면 예뻐할 수 밖에 없는 오프닝. 왕년의 아이돌 그룹 소녀시대의 킬러곡으로 문을 열어젖힌 영화는 연이어 서울의 풍경을 전시함으로써 나같은 한국 관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동안 서울을 액션 영화적 공간으로 삼은 미국 영화들은 꽤 있었지만, 이렇게 로맨틱하고 서정성 짙은 공간으로 활용한 경우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서울 분량이 많은 것도 아니고, 때때로 또 <블레이드 러너> 수준에 머물러 있는 낙후된 느낌도 없지 않아 있지만 그래도 그거 나름대로 재밌긴 함. 무엇보다 남산타워 사랑의 자물쇠를 영화의 이야기적 설정과 연결시킨 부분이 썩 마음에 들더라고.

이어지는 라라 진과 피터의 연애 이야기. 영화에서 괄목할 만한 부분이, 대사를 참 잘 썼다는 것이다. 망작처럼 느껴졌던 2편도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유독 3편의 대사는 귀엽고 말랑말랑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라나 콘도르와 노아 센티네오를 포함한 모든 배우들이 그걸 잘 치고 있고. 아니, 진짜로 배우들이 다 제 몫 이상을 충분히 해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호러 영화와 더불어 로맨틱 코미디야말로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연기가 반드시 필요한 장르일텐데, 이 영화 속 두 남녀 주인공이 서로에게 장난을 칠 때와 달짝지근한 눈빛을 전달할 때. 그 모두가 진짜 같다. 연기도 좋고 조율도 잘된 느낌.

더불어 가장 젊은 영화이기도 하다. 인스타그램 피드와 스마트폰 카메라 화면 등을 영화적 문법으로 적극성 있게 끌어 오고, 이미 많이 끌어올린 소재인 것은 맞지만 어쨌거나 고등학생들의 전유물이라고 할 만한 프롬 축제 등의 소재도 너무 과하지 않게 잘 썼다. 고등학교 3학년을 주인공으로 한 하이틴 영화들이 대개 프롬 축제라는 소재 하나로 뽕을 뽑기 위해서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하다가 뇌절 해버리는 경향이 많은데, 이 영화는 그걸 잘 피해간 느낌. 프롬 축제를 딱 이야기와 설정의 양념으로만 쓰고 쿨하게 정리해버리는 태도가 마음에 든다. 

그리고 무엇보다, 연출이 진짜 맘에 든다. 뭐,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마틴 스콜세지나 봉준호 급의 연출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하이틴 장르 특유의 발랄함과 설레임이 적절하게 안배되어 있는, 그야말로 장르에 잘맞는 연출을 보여준다. 서로 다른 시공간을 엮어내는 간단한 연출부터, 인물 내면의 갈등을 시각적으로 풀어내는 방향 역시 마음에 든다. 여기에 <위대한 레보스키>나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등의 다른 영화들을 언급하는 방식도 내 스타일. 아니, 진짜로 감독이 뭔가 작정한 것 같다니까? 아니면 원래 연출은 평균 이상 하는 사람이었나? 2편의 각본이 그냥 거지 같았기에 어쩔 수 없었던 걸까?

하이틴 로맨틱 코미디 영화들은 모두 우리에게 약속을 한다. 당신을 설레이게 만들어줄게요, 두 주인공을 사랑하게 만들고 또 그 둘의 관계를 응원하게 만들어줄게요, 보는내내 뿌듯하고 기뻐서 웃음짓게 만들어줄게요- 등등. 그러나 생각보다 그 약속들을 잘 지켜내는 영화들이 이쪽 바닥엔 드물다. 떠올려보라, 우리가 걸작으로 칭송하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들? 그거 대부분 다 90년대에서 끝났지. 요즈음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들 중에서 온전히 만족한 경우가 대체 얼마나 되나? 물론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시리즈 역시 걸작이란 타이틀을 붙이기에는 아직 새파랗게 모자라다. 그러나 이 영화는 최소한 보는내내 날 웃게 만들었다. 그리고 언제나 말하지만, 장르 영화에서는 그걸로 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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