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2/19 16:46

리저너블 다우트, 2014 대여점 (구작)


잘나가는 검사인 주인공이 술 거나하게 마시고 음주운전을 하다가 웬 남자를 쳤다. 그나마 다행히 죽진 않았고 아직 숨은 붙어 있는 상태인데, 생각해보니 나 술 마셨잖아? 여기서 음주운전한 거 걸리면 화려한 커리어는 날아가고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귀여운 딸랑구와 예쁜 아내 역시 쎄굿빠겠지? 결국 주인공은 뺑소니를 선택한다. 그렇게 유야무야 잘 넘어가나 했으나... 어라? 어젯밤에 내가 쳤던 그 남자가 죽었다네? 그리고 그 범인으로 웬 다른 남자가 체포 되었다네? 게다가 그 사건의 담당 검사로 배정받은 주인공. 이야, 이건 딜레마 꽤 잘 쌓아놓은 거잖아. 저 용의자를 범인으로 몰기에는 내 양심이 찔리고, 그렇다고 반대로 하자니 내 인생 날아가게 생겼네. 

앞서 정리한 것처럼, 설정이 정말 좋다고 생각한다. 이런 종류의 영화에 필요한 주인공의 딜레마가 잘 설정되어 있고, 무언가 콤팩트 하면서도 묵직한 이야기 구조다. 여기에 주인공이 검사니까, 법정 스릴러 쪽으로만 쭉 풀고 갔으면 더 재밌었을 것 같아. 근데 영화는 뻔한 양산형 스릴러의 길을 걷는다. 자신이 쌓아놓은 흥미로운 가능성들을 모두 쿨하게 날려버리고 그냥 평범해지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 무매력으로 일관한다. 

얕은 수로 속이는 연출이 꽤 많은 편이다. 예를 들면 그런 거. 뺑소니 사고낸 주인공 앞으로 경찰들이 나타나는데, 주인공은 자신을 체포하러 오는 줄 알았지만 알고보니 다른 용무로 온 경찰들이었다는 거. 그리고 여기에 슬로우모션까지 주구장창 걸어댄다. 이런 식의 페이크 연출이 존나 많다. 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세네번. 그러다보니 별로 효과도 없음. 근데 또 그런 생각도 들더라. 그냥 켕기는 구석이 있는 주인공의 편집증적인 심리를 표현하려고 했던 거 아닐까-하는. 이러나 저러나 효과가 없는 건 객관적인 팩트지만.

미스테리 스릴러 영화를 만들 때, 각본을 쓰는 입장에서 중요한 것은 충분한 개연성이다. 그 개연성이란 것은 누가 누굴 왜 죽였고 어떤 방식으로 죽였는지 따위의 큰 흐름에서 뿐만이 아니라, 인물들의 사소한 행동과 그 결과에서 조차 충분하게 필요하다. 그런데 <리저너블 다우트>에는 바로 그런 개연성들이 다소 부족해보인다. 아니, 그러니까 사무엘 L 잭슨의 얼굴을 한 연쇄 살인범이 과거 아내와 딸을 잃은 슬픔과 분노로 다른 범죄자들을 사냥하고 다니는 거? 그거 오케이. 주인공인 검사가 음주운전하다가 사고 내놓고 뺑소니 치는 거? 그것도 당연히 오케이. 이런 이야기 큰 줄기에서의 개연성은 나쁘지 않다, 이 말이야. 근데 세부적인 부분들에서는? 피떡이 된 이복형제를 발견하고 구하기 위해 주인공이 구급차를 부르는데 갑자기 전화 통화가 안 된다? 그래서 경찰들에게 오히려 이복형제를 죽이려 했던 것으로 의심받는다? 왜 하필 거기서 전화가 안 터지는 건데? 아, 미국은 한국과 다르게 땅도 넓고 시스템도 아직 개차반이라 전화 안 터지는 지역이 많을 거라고? 그럼 그 지근거리에서 경찰에 신고 전화한 악당은 뭔데? 그리고 악당이 자신의 아내와 딸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자 경찰서를 탈출하는 주인공? 하필 주인공을 감시하는 경찰이 딱 한 명이었고 뒷통수로 헤딩했더니 알맞게 쓰러졌다? 어이쿠, 주인공 쓰기 좋게 총도 루팅할 수 있네? 이런 편리한 전개가 다 있나. 심지어 그 이후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은채 주인공은 경찰서를 유유히 떠난다. 아직 살인미수 용의자인데도! 여기에 우연히 바닥으로 떨어진 서류를 보고 악당의 진짜 정체를 간파해내는 주인공 아내의 귀신같은 타이밍과 또 안 터지는 전화가 화룡점정.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아까는 시 외곽 공장 지대라 안 터졌다고 해도 여기는 그냥 가정집이잖앜ㅋㅋㅋㅋㅋㅋ 아, 진짜...

사무엘 L 잭슨의 악당 캐릭터는 후반부에 급격히 무너진다. 과거 강도로부터 아내와 딸을 잃은 이후, 비슷한 범법자들을 남몰래 때려죽이는 과격한 자경단 설정. 좋다 이거야. 근데 어쨌든 각본상의 안타고니스트라 하더라도 이 인물 만의 신념과 가치관이 명백히 서 있었어야 했는데, 이 놈은 갑자기 죄도 없는 주인공의 아내와 어린 딸을 죽이려 든다. 그것도 우발적이었다거나 어쩔 수 없었다는 식이 아니라 아예 철저히 연장까지 챙겨서 죽이러 옴... 이 순간 이 캐릭터의 설득력은 끝난 거지.

덩달아 이복형제 설정도 왜 넣은 건지 모르겠네. 누구나 두번째 기회를 얻을 자격이 있다는 메시지 때문에? 과거에 죄를 지은 범법자라고 해도, 반성하고 다시 잘 사는 거 괜찮지. 좋은 일이지. 근데 그걸 최근 음주운전에 뺑소니까지 쳤던 주인공 네놈이 이야기하는 건 좀 웃기지 않냐? 

설정 진짜 잘 깔아놓은 것 같은데 본인이 안 먹겠다며 상 뒤집어 엎은 꼴. 본인이 본인 상 엎었으니 뭐라 할 수는 없는데 하여튼 옆에서 지켜보는 나는 그게 존나 한심해보이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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