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북전쟁 종전 후 5년여가 지났음에도, 주인공 제퍼슨 키드는 전쟁 이전의 온전했던 삶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아니, 돌아가길 거부한다. 죽고 죽일 수 밖에 없었던 전쟁통 속에서 고향의 아내마저 병으로 잃었던 그에겐 남은 여생 자체가 그저 죄스럽고 무겁기만 할뿐. 그래서 고향으로 돌아가지도 못한채 여러 마을들을 전전하며 신문 기사를 읽어주는 이야기꾼으로, 끝없는 방랑자로 살아가게 된 그. 그러던 그가 한 소녀를 만나게 된다. 인디언에게 길러져 백인 어른들의 이야기를 알아듣지 못하는 소녀. 이제 키드에게 남은 건 이 소녀 뿐이다.
영화는 사막에서 벌어지는 <레버넌트>고, 폴 그린그래스의 <지옥의 묵시록>이며, 동시에 톰 행스크의 <로건>이기도 하다. 끝없는 황무지의 모습과, 보는 입장에서도 입 속에 텁텁함이 느껴지는 것만 같은 모래바람 등의 이미지가 <레버넌트> 속 극한의 자연 환경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리고 <지옥의 묵시록>. 코폴라가 <지옥의 묵시록>을 통해 그렸던 것처럼, 폴 그린글래스도 깊숙하게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맞닥뜨릴 수 밖에 없는 야만의 세계를 나지막히 묘사 해낸다. 지금까지 숱한 서부영화들을 봐왔지만, 새삼스럽지만 그 당시가 무법시대였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더 처절하게 느끼게 하는 영화였다. 화려한 손기술을 가진 일당백의 총잡이를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들만 봐와서 그랬나, 그동안 봐왔던 서부는 그저 한 단계 한 단계 클리어 되어야할 비디오 게임 속 스테이지 같은 느낌이었는데 이 영화는 늙고 지친 남자가 주인공이라 그런 건지 뭔지 배경이 되는 세계가 마냥 아득 하게만 느껴졌다.
개인의 사정과 사연 따위 집어치울 수 밖에 없게 되는 당시의 공권력 및 관료주의의 태만과, 어린 소녀를 팔아먹기 위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득달같이 달려드는 무뢰배 집단, 대규모 가죽 무두질 노동을 착취 하면서도 끝까지 프로파간다만을 외치는 닫힌 사회의 독재자, 그리고 짐짓 평화로워 보였지만 노동이 곧 생존으로 직결되는 상황에서 그 아래 있던 야만성이 가만히 피어오르는 농촌 마을까지. 황무지 끝으로 걸어들어가면 갈수록 숨겨져있던 야만성들이 갖가지 방식으로 표출되는 적나라한 세계. 이쯤 되면 지옥의 로드무비로써 정체성을 다졌던 <지옥의 묵시록>이 걸었던 길을 이 영화 역시 걷고 있다고 봐도 되겠지.
그럼에도 그 와중에 마음을 잡아끄는 존재가 있다면 그건 결국 톰 행크스의 얼굴을 한 제퍼슨 키드다. 모든 것을 잃고 방랑하지만 끝내 최후의 양심과 기개 만큼은 잃지 않았던 사내. 돈이나 명예가 목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그저 선한 마음가짐 하나만으로 이 모든 고행을 들쳐업은 남자. 그리고 끝내는 자기 자신을 용서하며 사랑하게 되는 불굴의 끈기를 가진 인간. 바로 그 주인공의 얼굴이 톰 행크스라는 것은 큰 울림을 준다. 뭐 빠지게 고생만 하다 뒷북이긴 했지만 소녀를 통해 끝내 가족의 의미와 사랑을 깨달았던 게 휴 잭맨의 얼굴이었다면, 다른 소녀와 함께한 톰 행크스의 얼굴은 결국 스스로를 용서하곤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표정을 띈다. 단순하지만 그게 좋았다. 톰 행크스가 아닌 다른 남자의 얼굴이었다면 그건 그거대로 또 다른 의미였겠지. 지금과는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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