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02 15:22

카오스 워킹 극장전 (신작)


어쩌면 모태 솔로들 최악의 공포. 만약 당신이 이성 경험 전무한 모태 솔로인데, 가까스로 잡게 된 첫 데이트의 기회에서 자신의 뇌내 망상과 마음의 소리들이 그대로 상대에게 공표된다면 어떠하겠는가. 시발, 상상만 해도 존나 끔찍한 경험인데?


스포일러 워킹!


상대의 속마음을 읽는 초능력을 가졌거나 또는 그 반대로 자신의 속마음을 타인에게 모두 들키는 주인공의 영화들은 꽤 있었다. <사토라레>나 <왓 위민 원트>가 가장 먼저 떠오르지. 그러니까 <카오스 워킹>의 설정이 이 영화만의 고유한, 그러면서도 최신의 설정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난 신선하게 느껴지더라. 물론 <사토라레>나 <왓 위민 원트> 같은 영화들이 있었지만 딱 그 정도였던 것도 사실이잖아. 메이저 영화판에서 구구절절 써먹던 단골 소재까지는 아니었으니, 이를 SF적인 상황과 로드무비 감수성에 버무리려는 시도 자체는 신선했다 할 만하다.

자신의 속마음과 상상을 모두 들켜버리는 세계. 그러다보니 영화는 결국 '생각'과 '상상'이 이루어내는 공포를 탐구하려 든다. 원래 어떤 사소한 생각들도 하고 또 하고 계속 하며 혼자 머릿속에서 굴려가다보면 그게 결국 눈덩이처럼 커지고 불어나 스스로를 잠식하게 되지 않나. 영화의 악당이자 매즈 미켈슨이 연기한 프렌티스 시장이 딱 그렇다. 그는 좀처럼 생각을 읽을 수 없는 여성들에게 두려움을 느끼고 자신처럼 노이즈를 지닌 남성들을 선동하고 규합해 대규모 학살을 벌인 뒤 결국엔 스스로 독재 군주의 자리에 오른다. 여기에 광신도 목사는 또 어떻고? 이 양반은 처음부터 끝까지 회개하라는 말만 외치지 않나, 마음 속으로든 겉으로든. 단 한 가지의 생각에 몰두하다 보면 그게 신념이 되고 곧 자신의 전부가 되어버리는 공포. 인간이 만든 모든 체제와 악법들, 전쟁들은 처음엔 모두 단 한 가지의 사소한 생각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생각'과 '상상'은 구원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생각'과 '상상'을 우리는 '도구'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누가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플러스가 되기도, 마이너스가 되기도 하는 그런 가치 중립적인 도구. 그 도구를 프렌티스와 그 일당들이 세뇌와 공포 정치의 한 수단으로써 쓸 때, 우리의 주인공 토드 휴잇과 그 친구들은 그걸 위로와 위안의 수단으로 써낸다. 내가 누구인지를 밝히고, 나의 의지를 증명하며, 위기에서 벗어나고 또 잃어버린 누군가를 추억하기 위해 쓴다. 영화의 이런 맥락은 분명히 흥미롭고 관심이 동할 만하다.

그럼에도 단점들의 합이 만만치 않게 커서 영화의 이런 맥락을 해친다. 일단 영화가 품고 있는 핵심 미스테리.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드러나는 타이밍과 그 본질 자체도 실망스러웠다. 서로의 차이 때문에 남성들이 여성들을 죄다 죽였다고? 물론 어쩌면 이를 두고 현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젠더 갈등에 대해서 탐구해 볼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개연성의 부재가 우리에게 그럴 여지를 잘 주지 않는다. 당장 떠오르는 생각이, '아무리 그래도 여자들을 다 죽인다고?'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아니, 이 영화의 악당이고 또 미친놈인 것도 맞으니까 여자들을 다 죽였다는 설정 자체가 납득 불가능한 건 아니지. 근데 그럼 후손들은 어떻게 남길 건데? 이 영화 속의 세계는 과거 미국의 서부 시대를 떠올리게끔 만드는 개척자의 그것인데, 보통 사냥이나 농업처럼 1차 산업을 핵심으로 삼는 사회는 노동력을 중요시 여길 수 밖에 없잖아. 그럼 좋든 싫든 아이를 많이 낳아 기르는 게 제일 중요하다는 건데, 여자들을 그냥 마구잡이로 다 죽인다고? <매드 맥스>처럼 여자들을 가둬다가 통제하는 사회가 아니고, 소수만 남긴채 다 죽인 사회도 아니라 그냥 싹 다 죽였어? 그럼 너네가 앞으로 뭘 어떡할 건데?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지 않나. 내가 독재자라면 체제 유지와 권력 승계를 위해 임모탄 조 마냥 오히려 후손들을 남기는 데에 더 집착 했을 텐데... 이게 말이 되냐고... 그냥 미친놈이라고만 우기면 할 말 없긴 하다

어쨌거나 그 반전 아닌 반전도 별 재미가 없었을 뿐더러, 그걸 드러내는 타이밍도 다 불발. 특히 주인공의 유사 아버지이자 멘토로서 묘사되는 프렌티스 시장이, 알고보니 사악한 독재자였다는 걸 밝히는 타이밍이 너무 빠르게만 느껴진다. 그러다보니 이 캐릭터가 너무 납작해. 그나마 매즈 미켈슨의 우아한 카리스마로 납득되는 거지, 그것도 아니었으면 그냥 이상하고 또 허무한 악당으로만 남았을 거임. 심지어 그 최후마저도 별 거 없는 양반이거든.

프로덕션 디자인의 문제도 있다. 지구가 아닌 행성을 배경으로 하며 SF적 색깔을 띄고 있긴 하지만, 사실 이 영화는 서부 영화의 바이브에 더 가까운 전개를 가지고 있거든. 서부를 배경으로 한 로드무비. <레버넌트>나 <로건>처럼 말이다. 한 남자가 미스테리의 열쇠를 쥔 한 여자를 어느 지점까지 모셔야하는 플롯이니까. 하여튼 이 내용도 사실 뻔한 거지. 근데 여기에 비주얼까지 뻔하면 심각한 거 아니냐고. 모든 씬들이 다 몰개성하다. 하나같이 다 어디서 봤던 것들의 연속. 내용이 존나 뻔하고 전형적이여도 그 프로덕션 디자인이나 분위기 만으로 컬트의 반열에 오르는 영화들이 있지 않나. <블레이드 러너>나 <스타워즈> 같은 영화들이 그렇지. 그 영화들은 어느 한 씬 어느 한 쇼트를 딱 떼어 놓고 봐도 표가 나잖아, 이건 <블레이드 러너>고 이건 <스타워즈>라는 게. 근데 <카오스 워킹>에는 그런 게 전무하다.

여러번의 재촬영과 개봉일 수정 이슈 등으로 이미 제작단계에서부터 망작의 포스를 뿜어내고 있는 영화이긴 했었다. 그래서 그랬던 걸까? 그런 소식들을 듣곤 나의 기대치가 너무 낮았던 걸까? 막상 본 영화가 뭔가 사지는 멀쩡한 느낌이라 좀 놀랍긴 했었다. 때문에 생각보다는 재밌게 봤음. 그래도 더그 라이만의 신작이 이 정도라면 문제 있는 건 맞지. 그치만... 그치만... 멘치가 너무 귀여웠는 걸... 그건 어쩔 수 없었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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