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속 모두가 말한다. 미나리는 어디서나 잘 자란다고. 신경쓰지 않고 냅두면, 자신이 알아서 뿌리를 내리고 물길을 찾고서 결국 자라난다고. 그러나 그건 미나리를 지켜보기만 한 이들의 관점일 뿐이다. 그럼 미나리 본인의 관점에서는? 그토록 알아서 잘 자라는 미나리는, 사실 그 이면의 엄청난 노력을 통해 자랐을 것이다. 알아서 잘 자란 게 아니라 충분히 힘들고 지쳤지만 그럼에도 각고의 노력 끝에 자랐을 것이다. 힘들여 뿌리를 내리고 멀리 뻗어 물길을 찾은 후에야 위로 더 높고 옆으로는 더 넓게 자라고 번졌을 것이다. 영화 <미나리>는 바로 그 미나리의 관점에서 한 가족을 바라본 영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영화적인 톤과 일상적인 톤이 1980년대 아칸소 깡촌 속 한국인들 만큼이나 이질적으로 뒤섞여있다. 예컨대 각본은 일상적이다. 인물들의 사실적인 대사와 그 연기는 물론이고, 할머니가 어색하기만 한 어린 손자의 모습이나 부모가 다투는 동안 그걸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아이들의 불안한 눈빛 등이 그렇다. 회초리 가져오라는 아빠의 말에 어린 아들이 어설픈 동작으로 회초리 부수는 장면도 역시 그렇지. 주요 플롯의 타이밍과 그 묘사 또한 마찬가지. 서로를 멀게만 느끼던 할머니와 손자가 그 거리감을 일순간 좁히며 서로를 부둥켜 안은채 잠자리에 든다. 일반적인 가족 영화였다면 이 장면을 기점으로 그 둘의 솟아나는 추억과 감정들에 대해서 깊이 탐구했겠지. 허나 <미나리>는 그 장면 직후 곧바로 할머니에게 뇌졸중을 던져준다. 이제서야 둘이 가까워지는가 싶었는데, 결국엔 그럴 기회조차 박탈해버리고 마는 삶의 아이러니. 여기에 그 할머니와 엄마의 관계는 또 어떠한가. 할머니가 병원 침대에 누워 쓰러져있으면, 그걸 보는 딸이 눈 감은 엄마의 손을 붙잡고 엉엉 우는 신파 장면 하나 있어야 영화적인 문법으로는 맞는 거잖아. 그러나 <미나리>는 여기서도 뻔하게 가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 현실적이다. 가족 구성원의 병은 그렇게 문득 오는 것이고, 또 그 병에 대한 설명은 이토록 덤덤하게 하는 것이다. "할머니 어떻게 됐어요?"라는 말에 수화기 반대편의 엄마가 "괜찮으니까 오늘은 친구네 집에서 자고 와"라고 답하는 것처럼.
이렇게 각본이 일상적인 반면 촬영과 조명, 음악 등의 요소는 다분히 영화적이다. 얕은 심도의 촬영은 아칸소의 녹빛 전체를 몽롱해보이게 만들고, 더불어 여기에 더해지는 메인 테마의 음악 역시 차분한 들뜸을 잘 보여준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우리가 극중의 할머니 또는 폴이 되어 이 한 가족의 뒤를 살랑살랑 따라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사실 이야기 자체는 별 게 없지 않나. 서사가 풍족한 영화는 아니거든. 좀 싸잡아 말하면 그냥 미국 농촌 생활 브이로그처럼 보이는 게 사실이기도 하고. 그런 난점을 <미나리>는 시네마틱한 룩과 사운드로 뚫는다. 따지고 보면 별 거 아닌 이야기인데 그걸 존나 영화적으로 느끼게 하는 마법의 촬영. <미나리>의 시네마틱한 매력은 바로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가족들, 특히 스티븐 연의 가장 캐릭터는 자기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척박한 이 땅을 개간 하려 든다. 그러나 마지막 에필로그까지 보고 나면 그가 선택하는 건 결국 다분히 미국적인 방식이다. 말도 안 되는 것 같고, 불편한 데다, 멍청하게 보이기까지 하지만 그럼에도 그 땅과 그 사회의 방식에 적응하는 것. 그렇게 그 곳의 주인이 되는 것. 그것이 비단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넘어간 이민자들 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면서 여러 '시작'들을 마주할 수 밖에 없는 우리로서도 배우고 견지해야할 삶의 태도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해본다.
하여튼 좋은 영화인 건 맞는데, 너무 개연성 작살난 부분들도 좀 있어 아쉬움. 막판 화재 사건은 영화의 클라이막스로써 응당 필요한 장면이었음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그 발화점이 너무 억지스럽다. 그냥 이 타이밍쯤에는 불을 내야하니까 억지로 막 불 내버린 느낌. 극중 폴의 활용도도 좀 아쉽고. 아, 그리고 무엇보다 결말까지 달려가는 태도가 너무 급작스럽다. 이 정도면 무슨 도마뱀 꼬리 자르듯이 끝난 느낌인데. 좋은 영화고 몇몇 장면들은 정말 울컥울컥하면서 보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본편보단 예고편이 좀 더 좋은 영화로 기억에 남을 것 같다. 그래도 골든글로브 수상은 축하. 그게 외국어영화상 부분인 건 다소 짜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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