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09 15:27

폭풍 속으로, 1991 대여점 (구작)


나 이거 거짓말 안 하고 딱 20년 만에 다시 봤거든? 20년 전 그 날엔 존나 재밌는 영화였는데 어째 20년 후 이 날엔 맥없이 급 발진하고 낭만 밖에 안 남는 허무한 영화처럼 느껴지네.

내 어린 기억 속 이 영화의 정점은 키아누 리브스의 조니 유타와 패트릭 스웨이지의 보디, 그 둘 사이 우정에 있었다. 어린 소년이었던 나조차도 남자들간의 빛나는 우정과 끈적한 의리에 대해 일종의 경외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가면을 쓰고 쫓기는 보디와 그를 쫓는 조니. 끝내 보디에게 총구를 겨누는 조니이지만, 두 남자의 맞부딪힌 눈과 그 눈을 통한 일순간의 짧은 비언어적 대화를 통해 결국 조니는 그 총을 쏘지 못한다. 보디에게 차마 쏘지 못한 그 총과 한을, 애먼 하늘에다 터뜨려버리는 조니의 모습. 아... 이 얼마나 남자답게 뜨거운 장면이란 말인가. 진짜 딱 이런 묘사들 때문에 재밌게 봤었던 거라고. 솔직히 이 영화에 나오는 액션들 중에 그 당시의 내가 혹할만한 것이라곤 별로 없었지. 나 어렸을 때만 해도 이미 <쥬라기 공원>이나 <터미네이터2>가 나온지 한참 되었을 시점이니까. 

근데 이게 일종의 추억 보정이었다. 아니면 에드가 라이트가 <뜨거운 녀석들>을 통해 펌핑 넣어준 가짜 낭만 스테로이드였든지. 막상 다시 본 <폭풍 속으로>에는 드라마와 감정이 너무 가볍게만 다뤄지고 있더라고. 상술했던 저 장면이 힘을 얻으려면, 그리고 조니와 보디 두 남자 사이의 끝까지 가는 이 대결이 더 추진력을 얻으려면 다른 무엇보다도 영화의 드라마가 중요했으리라. 그러니까 은행강도단 내부에 자리 잡은 잠복요원 조니와, 그 강도단의 두목 보디 사이의 원초적이면서도 드라마틱한 무언가가 더 있어야 했단 소리다. 허나 영화는 그 둘 사이를 잘 붙여 놓으려 하다가도 다른 인물들을 끼워넣음으로써 이야기를 산만하게 만든다. 조니가 결국 사랑에 빠지게 되는 테일러라는 캐릭터는 애초 안 나오는 게 더 나았을 것이다. 그 여자가 들어가니까 두 남자만의 이야기가 잘 안 살잖아. 오히려 막판에 가서는 결국 또 뻔한 공주님 구하기로 귀결되는 거잖아.

장르도 살짝 다르고, 이 영화에 비하면 나온지도 얼마 안 된 편이지만. 차라리 이런 묘사는 <도니 브래스코>나 <신세계>가 더 잘했던 것 같다. 이 두 남자 사이의 끈적한 관계가 불타오르고 또 불타올랐어야만 더 강해질 수 있는 영화였는데 여러모로 참 아쉬움. 그렇다고 액션 영화적 쾌감이 큰 영화도 아니니까 말이다. 한창 젊은 날의 얼간이처럼 맑은 키아누 리브스와, 다부지다 못해 딱딱해보이기까지 하는 패트릭 스웨이지까지 캐스팅은 겁나 잘 해놨는데 왜 이렇게 된 거야... 여기서 망하니까 철없는 애송이들의 결말로 마지막까지 오그라들어 버리잖아...

그럼에도 캐서린 비글로우의 연출은 특기할 만하다. 각본이 아쉬운 거지, 복잡한 초반 설정을 몇 쇼트로 훌륭히 가지치기한 다음 관객 귀로 몽땅 때려넣는 캐서린 비글로우의 패기 만큼은 대단한 영화. 원래는 이거 다시 보고 리메이크된 2015년작까지 감상하려 했었는데, 훨씬 더 좋은 평가를 받는 원작을 생각보다 재미없게 본 직후라 리메이크판 볼 엄두가 아예 안 나버렸음. 어쩐지 그냥 안 보게 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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