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09 15:49

라푼젤, 2010 대여점 (구작)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 보러 가기 전에 감성 싱크로 좀 맞춰야할 것 같아서 오랜만에 다시 꺼내 본 영화. 사실 디즈니의 프린세스 라인업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래서 다시 본 거지.

외딴 성 안에 홀로 갇힌채, 긴 머리카락만 부여잡고 자신을 구하러올 남자를 기다리는 라푼젤의 이야기. 사실 이야기에 있어서는 전형적이다 못해 뻔한 영화고, 실제 이 영화가 갖는 태도도 그런 데에 있어 별 욕심이 없어 보인다. 아, 물론 고전 동화와 완전 판박이 스토리라는 건 아님. 현재 시대에 맞게 나름 리뉴얼된 부분들도 있다. 남자를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쥐어패고, 아주 신난 표정을 하곤 스스로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는 라푼젤의 모습 등은 분명 어느정도의 현대화를 거친 결과물일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의 사소한 디테일들을 제외하면 이야기가 뻔한 건 팩트. 솔직히 보면서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갈지 훤히 보이는 건 어쩔 수 없잖아?

디즈니의 현명함은, 그런 이야기적 약점은 인정하되 대신 그걸 만회하고자 다른 부분들에 노력을 몽땅 때려넣었다는 데에 있다. 한마디로 이야기는 뻔한데 영상미와 뮤지컬 넘버들이 너무 좋아서 그야말로 눈호강 귀호강하는 영화. 제작 당시 일반적인 디즈니 애니메이션들의 평균 제작비를 아득히 넘어선 규모로 만들어진 영화라고 알고 있는데, 과연 그만큼의 기술력을 제대로 보여준다. 라푼젤의 길고 긴 머리카락이 싱그럽게 휘어지고 활력있게 출렁일 때, 눈호강이란 게 다른 게 아니구나- 하게 된다. 픽사도 그렇고 드림웍스도 그렇고, 애니메이션이나 CG 부문에서 가장 어렵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물'과 '털'의 묘사다. 그 관점에서 본다면 <라푼젤>의 머리카락 묘사는 경천동지에 가깝다. 물론 이것도 어느새 10여년 전 기술이 되었지만 말이다. 

라푼젤의 머리카락 묘사 뿐만 아니라, 결국 관객들의 눈을 홀리는 건 중반부 등불 장면일 텐데. 이 부분도 기가 막힘. 나 이거 개봉 당시에 3D로 봤었거든. 그 경험은 아직까지 잊혀지지가 않는다. 수백 수천개의 등불들과 어울려 객석 안을 휘어잡는 뮤지컬 넘버도 더할나위 없이 훌륭하고. 사실 뮤지컬 넘버 구성으로 따져도 절대 꿇리지 않는 영화다. 본격적인 영화의 시작을 여는 라푼젤의 솔로곡부터 이 영화의 마녀인 고델의 넘버, 심지어는 귀여운 악당 아저씨들의 합창곡도 다 좋다. 앞서 말한 등불 장면에서의 'I see the light'는 바로 그 정점이고.

하여튼 전반적으로 만족스러운 영화인데, 딱 하나 아직까지도 의아한 건 라푼젤의 각성 장면. 어릴 때 유괴 되었단 사실을 근 19년 내내 모르고 살다가 갑자기 그 미스테리를 나홀로 풀어버리는 정신적 괴력. 근데 이건 사실 꼬투리 잡기 정도의 느낌이랄까? 조태오 말마따나 문제 삼지 않으면 상관없는데, 문제 삼으면 문제가 되는 부분. 각본가 입장에서도 머리 엄청 굴리다 결국 포기하고 이렇게 썼을 것 같긴 하다. 그나마 직전과 직후 쉴새없이 몰아치는 이야기로 좀 가려져서 그렇지.

그나저나 국내 개봉 당시에도 그랬었는데, 고델 역할에 계속 박해미가 떠올라 혼났다. 이보다 더 적절한 가사 캐스팅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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