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11 14:35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 극장전 (신작)


디즈니 애니메이션, 그중에서도 특히 디즈니의 프린세스 라인업은 최근 나름의 현대화를 거치고 있었다. 공주와 여성들은 가면 갈수록 조금 더 주체적인 면모를 배당받게 되었으며, 심지어는 왕자나 다른 남성 캐릭터와의 멜로 드라마로 이어지지 않는 면모까지 가지게 되었다. 그런 시대 흐름 속에서 새롭게 당도한 디즈니의 새 프린세스 라야는 다름 아닌 동남아시아 베이스의 캐릭터다. 그래, 유럽에서도, 동아시아에서도, 북미에서도 해볼 건 다 해봤으니 이제 다른 문화권으로 눈 돌릴 때도 됐지. 그러나 주인공 공주 캐릭터의 국적보다 더 눈이 가는 부분은 영화의 주제적 맥락과 장르적 태도에 있었다. 이젠 진짜 로맨스 따위 다 집어치우고 세상 한 번 구해보자 이거야.

인간이 용들과 공존하며 그들의 축복을 받고 살아가던 쿠만드라. 이 평화의 시기는 인간들의 내적 욕망을 상징화 해낸 괴물 드룬이 등장하면서부터 점차 갈라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각각 송곳니, 심장, 척추, 발톱, 꼬리라는 각각의 이름으로 분열된 쿠만드라를 다시금 하나로 규합하고 잃어버린 아버지를 되찾기 위해 우리의 주인공 라야가 출두한다. 혈통을 갖고 궁중 암투를 벌이거나 진정한 사랑을 찾기 위해 일생을 다바쳤던 기존의 공주들과는 다르게, 라야는 황폐화된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떠도는 방랑자이며 무법자고 또 모험가인 동시에 해결사다. 실제로 영화를 보는내내 기존 디즈니 프린세스 영화들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인디아나 존스>나 <만달로리안>, <석양의 무법자>, <매드 맥스> 같은 작품들이 더 가깝게 연상 되더라고. 

확실하게 그것의 맛이 존재한다. 사막, 정글, 고원 등의 다양한 자연환경으로 구분되는 여러 지역들을 외롭게 여행하는 주인공 라야를 보는 맛. 레이가 그녀 자신만의 스피더를 타고 자쿠 행성의 사막을 가로질렀던 것처럼, 툭툭을 타고 쿠만드라 곳곳을 누비는 라야의 모습에는 확실히 장르적인 맥락이 있다. 여기에 특정 아티팩트 시리즈를 되찾아야만 한다는 핵심 플롯이 고전 어드벤쳐 영화의 재미를 더해주고, 디즈니 애니메이션 치고는 꽤 자세히 묘사된 검술 및 권격 액션의 풍미가 나쁘지 않다. 그러니까, 기존 디즈니 프린세스 작품들의 전통적인 맛을 기대하고 본다면 다소 실망할 수도 있을 것. 나같은 경우엔 이 장르적인 묘사들이 썩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나름 재미있게 볼 수 있었다. 

주인공 라야 캐릭터의 매력이 전무하다-라는 비판도 있던데, 개인적으로는 주인공 삼아 달려가기에 괜찮은 캐릭터처럼만 느껴졌다. 하기야, 뻔하기는 하다. 이런 종류의 캐릭터들은 영화 역사 120여년에 널리고 널렸지. 그러나 라야는 주체적이다 못해 그것이 성공으로 남든 아니면 실패로 남든 간에 자신의 의견을 충실하게 고집하는 캐릭터고, 다른 사람들에게 고루 베풀줄도 알며, 무엇보다 짐이 되지 않는 주인공이다. 영화 속 대부분의 액션이 모두 그녀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점 때문에라도 더 라야가 눈에 띈다. 여기에 인간적인 딜레마까지. 라야는 완벽해보이되 그 안에 인간적인 균열까지도 잘 깃들어 있는 캐릭터다. 그러니까 개인적으로는 주인공이 마음에 들었다는 말.

여기에 멋진 조연 캐릭터들이 라야를 좌우로 보좌한다. 제목 속 '마지막 드래곤'인 시수는 특유의 강아지 같은 인상과 아콰피나 절정의 열연으로 관객들 마음을 빼앗는다. 그리고 그걸 떠나서도 시수는 그 자체로 미적인 아름다움이 충만한 캐릭터다. 용 답게 길고 긴 몸을 유려하게 펼친채 활공하거나 헤엄치는 장면 등이 계속 마음에 남는 이유다. 이외 캐릭터들 역시 정 붙이기가 쉽다. 물론 영화의 주제적 측면 때문에 집어넣은 캐릭터들이라는 것이 관객된 입장에서도 훤히 들여다 보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이 정도로 조물조물 잘 빚어놨으면 그냥 그러려니 하게 되는 거지.

미합중국의 새로운 대통령으로 조 바이든이 임명된지도 어느새 한 달 정도가 지났다. 그러나 그 전 대통령이 세상에 끼친 영향은 불행히도 아직 유효하다. 아, 물론 극중 라야의 대사처럼 어느 특정 한 명만을 악당으로 낙인찍은채 세상의 이 모든 풍파를 다 그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말이 안 되지. 그러니까 트럼프 만의 문제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았지 않았나. 우리는 몇 십년 전부터 지금까지, 분열의 세계 속에서 살고 있었다. 누군가는 국경에 벽을 쌓았고, 국가와 인종과 민족과 문화와 종교와 성과 성 지향성과 정치 지형도는 건너편과 그 건너편까지도 서로를 싸잡아 비난하는 시대였다. 갈등과 혐오의 시대, 분리와 분열을 조장했던 시대. 라야 말마따나 그게 어느 한 악당 만의 책임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실제 트럼프의 취임 이후 혐오와 분열주의를 비판적으로 다룬 영화들이 우후죽순 쏟아져나왔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관객과 영화계는 그런 영화들에 돈과 시간을 쓰고 각종 무거운 상패들까지 수여함으로써 그 비판에 동참해왔다. <시카리오>는 국경간 분쟁에 대한 이야기였고 <컨택트>는 포스트 바벨탑에 대한 텍스트였으며,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는 여성과 흑인, 외국인, 게이, 심지어는 괴물이 연합했다. <블랙팬서><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은 다인종과 타인종에 대한 경종이자 유머였지. 그리고 바로 그런 맥락 속에서,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은 우리에게 일종의 마침표처럼 큰 울림을 준다. 

이런 분열의 시대에 진정으로 가장 필요한 것은 서로를 믿는 '믿음'과 '신뢰'라는 것. 물론 누구나 다 알 법한 뻔한 내용이다. 그러나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은 한 발자국 더 구체적으로 들어간다. 지금의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의 핵심은 '순서 없는 믿음'이라는 것이다. 너에게 받은 만큼만 내가 해주겠다는 수지타산적 행보말고, 너에게 무언갈 받기 전에 내가 무언갈 먼저 주겠다는 그 태도. 첫 발을 내딛는 그 시도 자체의 숭고함. 안다. 그 시도는 실패할 수도 있다는 거. 영화 속 라야가 그랬고 시수가 당했던 것처럼, 먼저 베푼 선의를 악의로 되받을 수도 있다는 거. 그러나 언제나 말했듯, 인간은 그 태생부터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실패의 가능성 조차도 겸허히 받아들인채 '시도'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실패는 당연한 것이 되고, 가끔 찾아오는 성공이 오히려 복되고 소중하게 느껴지리라. 본디 '진리'는 하나이기에 더 소중한 법이다. 

바로 그 관점에서,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의 클라이막스는 사뭇 감동을 자아낸다. 우리 모두 함께!가 아니라, 내가 먼저 너를 믿을게.의 마음. 느낌표나 쉼표가 아니라, 마침표로 끝나는 그 마음. 순서 없는 믿음에 대하여. <라야와 마지막 드래곤>은 그런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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