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11 15:46

황혼의 사무라이, 2002 대여점 (구작)


사무라이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으면서도 구로사와 아키라 풍으로 무사도의 낭만이나 허무를 다루는 영화가 아니라 왠지 오즈 야스지로 풍 가족 드라마 같은 영화. 무사로서의 사무라이 보다도 일종의 회사원으로서 그들을 바라보는 태도가 우스우면서도 그래서 좋다. 

그러니까 주인공은 일종의 하급 공무원인데, 이 직장에서의 묘사가 흥미를 돋군다. 병으로 아내를 떠나보낸채 노모와 어린 두 딸을 홀로 키우는 이구치. 지금으로 치자면 본인 빼고도 먹여살릴 입이 셋이나 되는 싱글 대디다. 그래도 나름 공무원이니까 철밥통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하급 중에서도 하급 공무원인데다 이미 빚진 것도 많아 여러모로 빠듯한 형편. 때문에 퇴근 후나 휴일에도 농사 지으랴 부업으로 새장 만들어 팔랴 바쁘다. 심지어는 깍듯이 관리해야했던 촌마게 헤어스타일도 이구치만 지저분함. 하여튼 그러다보니 다른 직장 동료들이 퇴근 후 한 잔 하러 가자 꼬드길 때도 언제나 그만은 예외. 직장 동료들이 상관 모시고 회식하는 자리에서 이구치 살짝 험담하는 장면 웃기더라. 이거 그냥 현대물 아닌가 싶어져서.

매사에 자신만만한 무사가 아니라 뭔가 모르게 인간적이고 부드러우며 수줍은 인물로 이구치는 묘사된다. 쇼군의 명을 받들어 결투에 나서야만 할 때도 집에 두고온 자식들 얼굴이 아른거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명령까지 살짝 거부. 여기에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내내 제대로 말도 못 꺼내보다가 죽음을 예감하고 거의 막판에 이르러서야 서둘러 하는 고백도 귀엽다. 근데 이게 비단 주인공 이구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무라이들도 다 마찬가지로 묘사된다는 게 포인트. 보통 사무라이라고 하면 상관의 명에 자기 배까지 흔쾌히 가르는 인물들로 곧잘 묘사되는데, 어째 이 영화 속 사무라이들은 죄다 반대인 것만 같다. 술 취해서 이혼한 전 아내를 희롱하러 오질 않나, 쇼군 앞에서 어영부영 하지를 않나, 심지어 그런 대사도 있다. "우리는 눈치파야. 충성 이딴 게 어디있어!" 아무래도 보신 전쟁 직전 봉건제의 황혼으로 특유의 사무라이 정신이 많이 허물어져 가고 있던 시기라 이렇게 묘사한 듯. 어쨌거나 오히려 이런 점이 기존의 사무라이 영화들과는 다른 결로 느껴져 더 마음을 끌었다.

그런데 정말 대단하게도, 막상 사무라이 영화 특유의 결투 장면에 들어서면 영화가 굉장한 기합을 보여준다. 결투장으로 출근 직전에 벼락치기라도 하는 모양새로 허공에 목검을 내리치던 이구치가 "예전 같지 않네..."라며 읊조릴 때만 해도 '아, 이 새끼 존나 쳐맞고 오겠구나' 싶었었거든. 근데 확실히 실력자는 실력자였어. 주인공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클로즈업이나 화려한 카메라 안무 이딴 거 없이 두 배우만의 현실적인 합 만으로 긴장감을 엄청나게 뽑아낸다. 그야말로 간지가 철철 흘러넘치는 결투. 그래도 결투라고 해봐야 영화 속에 딱 두 번만 나오는데, 그 두 번 다 사람을 엄청 쪼그라들게 만든다. 애초 사무라이들의 결투라는 게 한타 싸움이다 보니 더 마음 졸이게 만드는 것도 있고.

클라이막스 속 젠에몬과의 결투가 특히 마음에 남는데, 영화의 주제적 맥락과 잘 붙어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집안에서 벌이는 결투. 그 상황적 현실을 고려하지 못하고 자존심에 장검 만을 고집하던 젠에몬은 바로 그 현실에 부딪혀 결국 패배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사무라이의 마지막 자존심을 고집하던 자는 모든 걸 내려놓은 황혼의 사무라이에게 죽는다. 이렇게, 사무라이와 봉건제의 시대가 지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아 무언가 적절하다 싶었다. 

개인적으로 사나다 히로유키를 참 좋아한다. 특유의 슬픔이 깃든 그 맹렬한 얼굴. 사무라이의 날, 아버지의 등과 같은 이미지로 남는 영화이지만 그럼에도 사나다 히로유키의 얼굴로 이 영화가 더 기억될 것 같다. 

뱀발 - 에필로그에서 이구치는 보신 전쟁 중 관군의 총탄에 맞아 전사한 것으로 묘사된다. 같은 보신 전쟁을 다루었던 <라스트 사무라이>에서 관군에 맞섰던 사나다 히로유키의 얼굴을 떠올려보면 두 영화 사이의 묘한 이음새가 느껴진다. 

뱀발 2 - 영화 내내 프레임 곳곳을 채우는 일반 농민들의 이미지가 많다. <7인의 사무라이>를 통해 구로사와 아키라가 말했듯, 사무라이의 시대가 지고 이제 농민들의 시대가 왔음을 보여주는 것 같아 또 그 두 영화 사이 이음새 역시 생겨나는 것 같기도 하고?

핑백

  • DID U MISS ME ? : 모탈 컴뱃 2021-04-13 16:23:16 #

    ...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개새끼였다. 적들에게 꼬드김 당하는 것도 존나 어이없어서 웃김. 돈 준다고 하니까 일말의 고민 없이 옳거니-하는 거 웃겼다. 개인적으로 사나다 히로유키를 참 좋아한다. 조 타슬림도 &lt;레이드&gt;와 &lt;검객&gt;에서 이미 눈여겨 봤었지. 스콜피온과 서브제로가 더 매력있게 느껴졌던 건 다 그들 때 ... more

  • DID U MISS ME ? : 미나마타 2021-10-10 22:46:06 #

    ... 스팅도 나쁘지 않았다. 정확한 제작 시기가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조니 뎁은 할리우드 스타 배우의 자리에서 오랫동안 군림한 사람이었으니까. 여기에 내가 좋아하는 사나다 히로유키, &lt;곡성&gt;을 필두로 최근 &lt;케이트&gt;까지 발판삼아 여러 할리우드 영화들에서도 얼굴을 내비치기 시작한 쿠니무라 준. 그리고 조니 ... more

덧글

  • rumic71 2021/03/11 17:01 # 답글

    젊을 적부터 사나다를 보아왔지만 그때와 지금이 완전 다른 사람 같습니다... 개인적으론 필살 극장판에서의 사나다 연기력이 최고라고 보지만요.

    http://rumic71.egloos.com/m/862974
  • CINEKOON 2021/03/17 13:57 #

    연기는 당연히 잘하지만, 그걸 떠나서도 특유의 매서운 동시에 충성스러워 듬직해 보이는 인상이 좋아요. 일본에서 영화 찍던 시절도 좋았지만 할리우드로 건너가 찍은 작품들에서의 그 모습도 참 만족스러운 배우... 저는 심지어 <더 울버린>에서의 표독스러운 모습도 좋았다고요!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