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17 13:13

포제서 극장전 (신작)


영화는 일종의 신체 강탈물이다. 돈받고 사람 죽이는 청부살인 업체가 온라인 게임처럼 타인의 신체에 접속해 살인 업무를 처리한다는 이야기. 그 실제적 효용성에 대해선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되지만, 어쨌거나 청부살인업체 입장에서야 썩 좋은 기술일 것이다. 사전 단계에서만 좀 빡빡하게 굴면 뒷처리 그딴 거 알게 뭐야- 할 수 있는 기술이니까. 어차피 남의 몸인데 살인 이후엔 도망칠 필요도 없고 지문 같은 흔적들 지우는데 공 들이지 않아도 되잖나. 

신체 강탈물인 동시에 결국엔 타인의 삶을 관찰하게끔 만드는 <이창> 플롯이기도 하다. 히치콕이 말했듯, 영화란 게 애초 관음의 매체 아니던가. 타인의 삶 변두리에서 그를 훔쳐보고 또 관찰하며 느끼는 여러가지 감정들. 다만 <포제서>는 그 변두리의 관점을 중앙으로 확 끌고 들어온다. '나'로서 타인을 관찰하는 게 아니라 그냥 내가 곧 타인이 되어버리는 이야기니까. 그럼 필연적으로 이런 이야기들은 두 가지 중 한 가지의 전개를 택하기 마련이다. 첫번째는 공감. 내가 곧 타자화 되어버리면서 이른바 역지사지의 자세로 그 타인의 관점을 경험하게 된다는 점에서. 아무래도 멜로 드라마적 전개지. 두번째는 혼란이다. 나와 타인의 정체성이 뒤섞여버리면서 점진적으로 스스로를 잃어버리게 되는. 정체성의 혼란. <포제서>는 이쪽에 더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그 혼란을 수식하는 여러 이미지들이 존재한다. 시종일관 더치 앵글로 삐딱하게 묘사되는 전경 샷과 바닥에 비친 주인공의 모습을 담음으로써 시뮬라크르로서의 인물을 담는, 뒤집혀 반사되는 이미지 등. 근데 특기할 만한 점은, 주인공을 비롯해 이 업무에 가담하고 있는 자들 모두가 프레임의 중앙을 차지하지 못한다는 것. 인물들의 대화는 모두 부담스러울 정도로 좁은 노즈룸으로 전개되고, 때문에 그들의 뒷통수에 더 큰 여백이 남게 된다. 본질적으로 불안함과 답답함을 자아내는 이런 프레임 구성을 통해 인물들을 가두지만, 정작 주인공이 타인의 몸으로 살아가면서 부터는 그 스스로 만든 공식이 깨져나가기 시작한다. 

청부살인업자인 주인공은 무기로 권총을 지급받았음에도 굳이 칼을 써서 상대를 제거한다. 방아쇠 한 번 툭하고 당기면 깔끔하고 편리하게 끝날 일을, 짧은 칼을 꽉 잡고 여러차례 힘써 찌르는 비효율적인 행위로 치환해서 행한다. 그러니까 크뢰넨버그 성씨를 가진 감독의 영화 속 주인공 아니랄까봐 그 가학성 자체를 즐기는 것처럼 보이는 것. 그 때문에 칼로 피부를 찌르는 이미지가 유난히 강조되어 여러번이나 나오는데, 그 삽입의 이미지는 이후 전개되는 섹스 씬과 연결된다. 섹스 씬도 꽤 여러차례 나오는 영화거든. 고로 주인공이 욕망 그 자체에 탐닉하는 인물처럼 느껴지고, 그 욕망을 얻어냄으로써 진정한 자신으로 변모하게 된다는 혼란. 존나 보는내내 나도 혼란에 빠져 아득해지더라고.

일종의 감정적 전이를 다룬다는 점과, 이미 다른 사람의 몸으로 살아가는 상태에서 또다른 가상 세계로 접속하는 장면을 통해 이중접속 아닌 이중접속을 묘사한 것 같아 재미있기도 했다. 근데 결론적으로는 영화의 템포가 너무 느리고, 그 아이덴티티 궤멸을 다룬 주제가 그리 새로운 것처럼 느껴지지도 않았기 때문에 마냥 지루하게만 봤음. 아, 그렇게도 보이더라. 주인공이 아들 크뢰넨버그처럼, 주인공이 접속한 희생양이 아빠 크뢰넨버그처럼. 아빠처럼 되고 싶은 아들의 욕망...이랄까? 

뱀발 - 숀 빈 당연히 죽을 줄 알았는데 안 죽어서 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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