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22 16:57

잭 스나이더의 저스티스 리그 극장전 (신작)


드디어 우리에게 당도한 전설의 1군. DC 유니버스의 전화위복. 잭 스나이더의 결초보은. 4년여동안 소문만이 무성하던 바로 그 영화.

4시간짜리 영화라 꽤 긴 편인데, 본편 보다도 이 영화의 뒷이야기가 훨씬 더 길고 길고 또 길다. 작품 자체의 완성도와 그 호오를 떠나서, 영화 역사상 이런 제작과정을 거쳤던 작품이 또 있었나 반추하게 되는 작품. 내가 봤을 땐 지금까지도 없었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봐라, 다른 곳도 아니고 할리우드에서 한 번 통제권을 잃었던 감독이 몇년 지난 뒤 다시 돌아온다? 이미 거하게 흥행 죽쒔던 블록버스터가 완전히 다른 영화로 재탄생해 다시 만들어진다? 거대 스튜디오의 관심과 계산이 아니라, 오로지 팬들의 집념과 사랑으로 이런 대형 상업 영화가 다시 공개된다? 이거 다 원래라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들이지. 근데 잭 스나이더와 팬들은 그걸 해냈다. 이 내용으로 다큐멘터리 하나 나와도 흔쾌히 볼 것 같음.

하여튼 그런 복잡한 과정 끝에 보게 된 영화... 다 보고 나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거였다. 이거 2017년에 개봉했던 극장판이랑은 완전히 다른 영화잖아?

0.
조스 웨던의 주도로 75% 정도가 재촬영 됐다-라는 주장에 신빙성이 더해진다. 일단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풋티지들이 이토록 많았나 싶어지고. 게다가 이거 CG와 색보정을 비롯한 후반작업들도 거의 다 된 상태였다는 거잖아. 그냥 붙여서 완성만 하면 되었던 것을 제작 당시의 워너 수뇌부가 대체 뭔 생각으로 그 많은 돈을 또 들여 다시 찍었던 것인지 정말이지 의문에 의문만. 

1.
영화는 좋은 점도 잭 스나이더답고, 나쁜 점도 잭 스나이더답다. 일단 단점부터. 영화의 런닝타임이 4시간이라는 게 가장 큰 문제다. 단순히 영화가 길어서 싫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만큼 잘라내도 되었을 장면들이 많았다는 소리지. 쓸데없는 장면들이 너무 많고, 잭 스나이더 특유의 슬로우모션 연출 역시 지나치게 많아 이야기의 전체적인 흐름을 방해한다. 물론 안다, 오로지 팬들을 위해 잭 스나이더가 모든 풋티지들을 삭제 없이 다 붙여넣었다는 것을. 그러나 그럼에도 별로인 건 별로인 거다. 극장판에 비해 각 인물들의 전사에 살이 붙은 것은 굉장히 만족스럽지만, 그 중에서도 하등 쓸데없는 장면들이 많았다는 것은 팩트. 게다가 그 슬로우모션. 그놈의 슬로우모션! 물론 플래시의 스피드포스 장면들에서는 슬로우모션을 쓸 수 밖에 없다는 거 인정한다. 근데 그런 장면들이 슬로우모션으로써 강조되는 효과를 얻으려면 최소한 다른 장면들에서 만큼은 슬로우모션을 덜 썼어야 했다. 애초 '강조'라는 게, 다른 평범한 부분들에 비해 확연히 돌출되는 묘사를 함으로써 얻어지는 효과잖나. 잭 스나이더는 그걸 못 한다. 심지어 액션도 아니고 로이스 레인이 카페에서 커피 사는 장면에까지도 슬로우모션 조금 걸려있는 것 같던데. 그런 장면들은 그냥 정배속 때려버리고 전체 런닝타임을 좀 줄이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맨 오브 스틸> 보면서도 지루했던 게 바로 그 때문이었다. 뭔놈의 액션이 다 강-강-강-강이야. 적당히 변속이 있어야 '강'이 더 강조되는 건데 처음부터 끝까지 세게만 때리니까 그 기준에 그냥 적응되어 버렸던 것. 하여튼 팬서비스든 뭐였든 런닝타임은 좀 더 줄이는 게 나았겠다. 

2.
메인 악당 스테픈울프의 리디자인. 아니, 오히려 이쪽이 오리지널이겠지만. 하여튼 그 디자인은 알쏭달쏭 애매모호인 것 같다. 굳이 따지자면야 조스 웨던의 버전보다는 훨씬 더 좋지. 근데 그렇다고 또 그 외형이 내 스타일은 아녔음. 딱히 엄청 무섭지도 않았고. 그러나 캐릭터 조형 면에서 보자면 압승이다. 여전히 다크사이드의 하수인 정도로만 묘사되지만, 그럼에도 그 안에 조금이나마 캐릭터성을 부여했다는 점이 맘에 든다.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기 위해 백의종군 중이라는 설정이라든지, 명색이 보스인데도 파라데몬들에게 통수 맞던 극장판의 최후에 비하면 차라리 이쪽이 더 장렬하고 나아 보이더라. 

3.
배트맨 문제가 있다. 극장판에 비해 클라이막스 전투 시퀀스에서 좀 더 활약을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수퍼맨이 뜨는 순간 쩌리짱 되는 건 시한문제. 그러니까 언젠가 잭 스나이더 본인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7인의 사무라이> 마냥 리거들을 규합하러 다니는 중반까지의 전개에서 배트맨이 더 강조 되었어야 했다고 본다. 어차피 수퍼맨은 이 팀의 지향점이고, 원더우먼은 감성이며, 배트맨은 이성이다. 고로 실질적 리더 역할은 이 배트맨이 다 했어야지. 사이보그나 플래시가 사연팔이 하면서 팀으로 묶이는 데에는 하등 불만이 없지만, 어쨌거나 그들을 한 팀으로 여며주고 동기부여 해주는 데엔 배트맨의 역할이 더 필요했다는 거. 아니면 차라리 옛날 DC 온라인 시네마틱 영상처럼 클라이막스 전투 한 가운데에서 각 리거들을 전략적으로 재배치하는 모습 보여주든가.

4.
그럼에도 극장판에서 존재했던 배트맨 유머의 대부분을 싹 다 걷어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사실 배트맨 뿐만 아니라 극장판에 비해 전체적으로 유머의 빈도나 톤이 줄어들었는데, DC 유니버스에는 이 정도 개그가 딱 맞는 듯 보인다. 배트맨이 내뱉자 마자 나조차도 탄식을 내뱉게 만들었던 "나도 피를 흘리지" 대사가 사라졌고, 입 잘못 놀리다가 원더우먼에게 명존쎄를 맞는 황당한 장면도 삭제. 그리고 극장판에서 브루스가 상의 탈의하는 장면, 나 그거 싫었었거든? 뭔가 나 이렇게 멍들어가며 고생하고 있다-라고 생색내는 장면 같아서 싫었었는데 다행히 그것도 잘라냈더라고. 하여튼 이 영화의 배트맨이 최고인 건 아닌데, 그럼에도 극장판에 비하면 거의 상전벽해를 이룬 수준. 이 정도가 아마 최선이었으리라.

5.
왜 트위터에서 레이 피셔가 징징 댔는지 알 만하다. 사이보그의 이야기는 영화의 감정적인 파트들을 담당하고, 캐릭터 자체의 매력도 극장판에 비해 월등히 늘어났다. 여전히 옆동네의 아이언맨이 계속 떠올라 겹쳐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히 매력이 있다. 아, 이 버전에서는 각 리거들이 각자만의 방식으로 영웅적 면모를 드러내는 에피소드들이 하나씩 존재한다. 불의 앞에선 단단하지만 페미니즘적 면모를 보일 땐 부드러워지는 원더우먼의 테러 진압 씬이 그렇고, 바다 한 가운데에서 표류 중인 사내를 존나 터프하게 구해놓고 댓가로 술을 요구하는 아쿠아맨의 모습 역시 그러하다. 플래시의 아이리시 웨스트 구출 장면이야 뭐 더 말할 필요가 없는 명장면이라 보고. 이런 장면들에 이어서 사이보그에게 배정되는 묘사는 다름아닌 사회적 약자들을 구원하는 영웅으로서의 모습. 사실 이 장면은 좀 줄이거나 아예 다른 방식으로 연출하면 어땠을까 싶기도 했다. 보는데 갑자기 생뚱맞은 구성으로 들어오는 느낌이더라고. 하지만 그 의미 자체에는 만족한다. 사이보그는 존재론적 자기혐오를 앓는 인물이다. 플래시나 아쿠아맨처럼, 평범한 외관으로 자신을 숨길 수 있는 부류가 아니다. 그런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 인물로서 뒷편에 조용히 숨은채 누군가를 구원하는 방식은 참 마음에 들었다.

6.
근데 다 떠나서 플래시가 너무 마음에 든다. 이 영화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닌데, 그럼에도 플래시 장면들은 어느 것 하나 뺄 게 없다. 모조리 만족이다. 극장판에서는 선보이지 못했던 팀플레이의 쾌감을, 잭 스나이더는 각 캐릭터들의 임무 분배로 조금이나마 해소해냈는데 그 중 플래시의 존재감이 유독 크게 느껴진다. 물론 나의 최애이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었겠지만... 상술했던 아이리시 웨스트 구출 장면부터 시작해 수퍼맨과의 아이컨택 장면은 여전히 좋고, 여기에 스피드포스를 통한 시간역행 장면으로 화룡점정을 찍는다. 사실 이 장면만 지금 며칠새 계속 돌려보고 있을 정도. 여기서의 대사와 표정 연기 만으로 배리 앨런이라는 인물의 아버지 이슈를 간략하게 묶어 표현한 것도 굉장히 좋았다. 그래... 솔직히 잭 스나이더에게 바라는 건 이런 거였잖아... 탄탄한 스토리와 전개 이딴 건 애당초 기대를 접었으니 이런 비주얼 쇼크를 제대로 보여주는 게 스나이더컷의 미덕이었겠지... 아! 정말 이 영화에서의 플래시는 무척이나 만족스럽다. 

7.
사이보그와 플래시가 이토록 푸쉬를 받을 동안에, 어쩔 수 없게도 원더우먼과 아쿠아맨은 살짝 손해를 보지 않았나-하는 생각. 물론 둘 다 솔로 영화가 있기 때문에 부담감은 덜 했겠지만, 각각 테미스키라와 아틀란티스 문화권을 함께 소개해야했다는 점 때문에 좀 묻힌 감이 있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의 아쿠아맨은 그냥 아쿠아맨으로서 등장하는 게 아니라 아틀란티스 떡밥까지 뿌려야 했기에 좀 묻혔다는 거지. 

8.
전우주적 관점에서 봤을 때 확실히 지구의 평균 전투력이 높은 것은 사실인 것 같다. 몇 만개의 세상을 무릎꿇린 바로 그 다크사이드도 지구 와서 탈탈 털렸었네... 하긴... 애초 우주 최후의 크립톤인이 본적을 두고 있는 행성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평균치를 아득히 상회하는 이유일테지만.

9.
여전히 떡밥의 양과 질이 좀 지나치단 생각은 있다.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나이트메어 씬들이 그러함. 존나 웃긴 건, 이게 <배트맨 대 슈퍼맨>을 납득하고 보면 그래도 꽤 잘 이어지는 떡밥이었단 것이다. 각 리거들의 솔로 무비가 출정 하지도 않은채 일을 이렇게 벌렸다는 것이 아직도 납득 안 가긴 하지만, 그래도 <배트맨 대 슈퍼맨>과 이어서 보면 어느정도 일관성도 보임. 물론 인저스티스 이벤트를 좀 빨리 벌이려고 했던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도 여전히 동일함.

10.
전반적으로 재미있게 보기는 했지만, 아직도 단점들이 많아 최고의 영화라 부르기엔 좀 어불성설인 감이 없지 않다. 그러나 웃긴 건, 첫 감상 이후 며칠 동안 계속 이 영화 생각만 했다는 거. 극장판에 비할 데가 전혀 없다. 모든 면에서 스나이더의 압승이다. 이제와서 이 판본을 DC 유니버스의 정사로 재설정하기는 어렵겠지만, 다른 건 모르겠고 그냥 영화 자체가 재미있으니 됐다. 그 망할 극장판은 보는내내 아무런 생각이 안 들었었다고. 이 정도면, 진짜 팬들을 향한 잭 스나이더의 결초보은이라고 볼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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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SAGA 2021/03/29 00:02 # 답글

    사이보그 역을 맡은 레이 피셔가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 알 수 있는 스나이더 버전의 저스티스 리그였습니다. 조스 웨던 판에선 의미없는 개그와 이상한 짓만 하던 사이보그가 원래 이런 캐릭터였다니... 배우가 빡쳐서 웨던 저격할 만하다... 싶었네요.
  • CINEKOON 2021/03/29 15:25 #

    저도 얼마나 아쉬웠을까 하는 생각만 들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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