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3/25 12:14

모리타니안 극장전 (신작)


고향 땅에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던 슬라히. 그런 그가 갑자기 사라진다. 6년 후, 알고보니 9/11 테러의 주요 가담자로 기소와 재판도 없이 6년내내 갇혀있었던 것. 그를 변호하기 위해 조디 포스터의 낸시와 쉐일린 우들리의 테리가 나서게 되고, 정부에서는 반대로 그의 혐의를 확정하기 위해 군검찰관인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카우치를 투입 시키게 된다. 

실제로 벌어졌던 역사 속 사건들이 영화 등의 예술매체로 넘어와 묘사되기 까지는 나름의 시간이 필요한 법. 우리는 순서대로 제 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 베트남 전쟁 등을 다뤘던 영화들이 시기적절하게 나오는 것을 한동안 봐왔다. 그리고 이제는 9/11 테러의 차례인가 보다. 9/11 테러와 그 직후 미국이 벌였던 전쟁을 다루는 영화들이 조금씩 조금씩 나오던게 내 기억으로는 이제 거의 10여년이 다 되어가는 것 같다. 폴 그린글래스의 <플라이트 93>이 있었고, 올리버 스톤의 <월드 트레이드 센터>가 있었으며, 캐서린 비글로우의 <제로 다크 서티>도 있었지. 그렇게 테러 그 자체와 전쟁의 화마가 휩쓸고 지나가자, 이제 영화계는 <모리타니안>을 통해 다시 한 번 반성적 시각을 견지한다. 테러와 전쟁의 과정 속 무고하게 피해를 봤던 한 개인들을 위한 영화. 여기에 정말 적절했던 건, 주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왔던 감독을 연출 자리에 앉혀놓았다는 것이었다.

법정 드라마적 요소가 가득하지만 정작 법정에서 벌어지는 일은 별로 묘사되지 않으니, 이른바 Pre-법정 드라마라고 해야하겠다. 아니면 인간 드라마 또는 사회 드라마. 영화는 제대로된 혐의점 없이 무려 6년동안의 인생을 박탈 당했던 인물의 궤적을 차분히 따라간다. 따뜻하기만 했던 가족의 품에서 갑자기 만난 좁고 차가운 감방. 모두에게 환영받는 상황에서 갑자기 맞닥뜨린 혐오의 눈길. 영화는 슬라히라는 인물을 그야말로 밀착취재함으로써 객관적인 동시에 주관적인 면모를 뽐낸다. 슬라히가 겪었던 객관적인 일들은 일종의 다큐 형식처럼 기록되고, 그 가운데 그가 하고 또 느꼈던 생각과 주관적 감정들은 영화라는 매체의 힘을 받아 관객들에게 온전히 전달된다. 자비에 돌란이 <마미>에서 썼던 화면비 전환 방식을 비슷하게 쓰는 영화이기도 한데, 그 목적과 방법론에 있어서는 <마미>보다 더 잘 쓰인 느낌이기도 하고. 물론 <마미>의 첫 화면비 변화 장면이 파워풀 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 자체로 좀 과시적인 느낌이 강했잖아. 허나 <모리타니안>은 거기에 그 어떤 과시적 느낌도 가미하지 않았다. <모리타니안>의 화면비 변화는 그냥 존재한다. 그러나 그 존재 여부에 따라 주인공이 느꼈던 압박감을 관객들도 느낄 수 있었단 점에서 더 효과적임.

사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그냥 억울한 1人의 변론 일기 정도일 줄로만 알았는데, 끝까지 다 보고 나니 결국 Post-9/11 시류의 일환으로 미국의 자기반성적 태도를 보여주는 내용이었다. 9/11 테러 자체가 굉장히 충격적인 사건이었고 또 엄청난 비극이었음은 인정하지만, 그로부터 촉발된 이후 일련의 사건들에서는 미국 스스로도 자신이 책임져야하는 적반하장의 일들 많이 벌였잖아. 폴 그린글래스가 <본 얼티메이텀>의 주적 셋팅을 통해, 그리고 크리스토퍼 놀란이 <다크 나이트>의 결말을 통해 보여주었던 미국의 자기반성 및 자기혐오적 태도를 <모리타니안>은 다큐멘터리풍의 고문 장면 몽타주로 관객들에게 그냥 던져준다. 괴물을 잡으려다가 끝내 스스로도 괴물이 되어버린 시대, 국가, 사람들. 영화에서 보여준 건 겨우 몇 분에 불과하였으나, 실제 슬라히가 지나왔을 그 고통의 시간들은 정말로 몇 일과 몇 달에 걸쳐 벌어진 일들이었다. 이게 과연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짓인가.

그러나 또 반대로, 바로 그 때문에 인간의 자유에 대한 갈망과 삶에 대한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사람이 사람에게 차마 하지 못할 짓들을 무수히 겪고도, 슬라히는 살아남았다. 아니, 살아냈다. 언제나 생각한다. 버티는 게 이기는 거라고. 살아있는 동안은, 언제나 우리가 승리해 있는 거라고. 슬라히는 이겼고 또 승리했다. 좁고 차가운 감방에서 다시금 가족에게로 돌아갔고, 혐오의 시선에서 다시금 따스한 환영을 맞이했다. 그 모든 걸 감내하고도 살아남은 슬라히처럼, 우리는 살아남아야 환영받을 수 있다. 살아있어야 친구에게 선물을 보낼 수 있고 존재해야만 노래 부를 수 있다. 영화 마지막 소개되는 슬라히의 실제 얼굴에 기쁨이 서려있어 나도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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