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마 설마 하며 수근대던 관객들을 정말 갈데까지 데려가버리는 영화. 아메리칸 슬래셔 호러의 궤적을 따라가다가 끝내는 좀비 호러, 크리쳐 호러, 호러 코미디, 코즈믹 호러까지 다 해먹는 영화. 이거 개봉 당시에 극장에서 처음 봤었는데, 보고 딱 든 생각이 그거였다. "이거 지금까지 존재했던 모든 공포 영화들의 마지막 시퀄이자 거대한 핑계잖아?"
영리한 각본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고, 그냥 그 컨셉 자체가 대단했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 이 영화의 핵심 트릭 빼놓고 보면 나머지 각본의 질이 그렇게 좋단 생각은 안 들거든. 근데 또 그것마저 멍청했던 지금까지의 호러 영화들 모두 끌어안으려 그랬던 거라면 또 할 말 없어지고. 하여튼 여러모로 치트키 같은 컨셉이었다. 컨셉이 워낙 신선하고 범용성 좋으니 각본 대충 써도 존나 있어 보이는 거지, 이게.
호러 영화로써는 전조 쌓기를 잘하는 편이다. 이젠 클리셰들 중에서도 꼰대 취급을 받을 장면이겠지만, 웬 늙은이가 젊은 주인공들의 불안을 조장하는 묘사부터 시작해서 '골빈 금발' 역할의 등장인물이 박제된 늑대와 찐한 키스를 펼칠 때 역시 마찬가지. 여기에 여러 아티팩트들로 가득찬 지하실 장면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두번째 보는 입장에서는 이 장면에서 별 거 없었다는 걸 간신히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썩 긴장감으로 충만했던 장면들이었다. 박제 늑대랑 키스하는 장면에서는 그 늑대가 갑자기 살아 움직여 혓바닥 다 뜯어버릴 줄 알았다니까.
감독으로서의 드류 고다드 스타일을 잘 보여주는 영화이기도. 검색해보니 드라마 위주로 활약했고, 영화 연출작은 이거랑 <배드 타임즈> 딱 두 편이더라고. 근데 그 두 편을 다 본 입장에서는 뭐랄까, 쿠엔틴 타란티노와 매튜 본의 하위 호환 버전 같은 느낌이랄까? 아, 여기에 가이 리치와 에드가 라이트도 더할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들으면 알겠지만 이 네 명의 감독들 모두 자기 스타일 확실한 사람들이고, 또 그러면서도 서로 비슷한 구석이 어느 정도 있잖아? 드류 고다드가 딱 그렇다. 영화 곳곳에 묻어있는 B급 코드는 매튜 본의 그것 같고, 장르 믹스하며 키치한 톤으로 타이틀 띄우는 건 타란티노의 그것 같음. 매튜 본과 타란티노 모두 장르의 대가들이고 메타 영화를 다루는 재능이 있었음을 돌이켜보면, 드류 고다드를 비슷하게 느끼는 것 역시 별로 이상할 게 아니다. 여기서 드류 고다드는 그야말로 호러의 서브 장르들을 뒤섞고 핏물 튀기며 놀아제끼니까.
아까 말했듯, 영화가 진짜 재밌었던 건 지금까지 존재했던 모든 호러 영화들의 핑계 같았기 때문이다. 늑대인간과 헬레이저, 킬링머신, 좀비, 인어, 거대 뱀 등의 지옥 생물들이 존재하는 세계관. 그리고 그 크리쳐들을 적재적소에 활용, 분노한 고대 신들을 달래기 위해 일종의 리얼리티 쇼로 그걸 기획하는 비밀 집단. 숨겨져있던 이 설정은 모든 호러 영화들에 그대로 통용된다. <13일의 금요일>? 그것도 이 기관이 제이슨 풀었다고 하면 됨. <나이트메어>? 마찬가지지. 이 기관이 프레디 크루거 데리고 있었다 하지 뭐. 이런 식이면 <프레데터>, <사탄의 인형>, <이블 데드> 등 모든 호러 영화들이 다 가능하다. 그야말로 범용성 쩌는 세계관.
어찌보면 그 비밀 집단은 호러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은유이기도 할 것이다. 희생자들을 어떤 순서로, 얼마나 잔인하게 죽일지를 놓고 토론하며 또 웃는 사람들. 다른 누군가를 만족시키기 위해 핏물을 첨벙대는 사람들. 이게 호러 영화 감독이랑 스텝들 아니면 뭐냐고. 그리고 그렇게 대입하기 시작하면 분노한 고대 신들은 관객들이 된다. 빡친 고대 신들이 그 큰 손으로 화면 움켜잡는 거? 그거 관객들이 못만든 영화 움켜잡고 존나 까대는 거랑 뭐가 달라. 호러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에겐 관객들의 악평이 곧 세상의 멸망인 것이다.
마지막에 시고니 위버가 나올 줄은 몰랐었는데, 극장에서 처음 볼 때 너무 반가웠었다. 사실 정말 사소한 역이고, 배경설정을 설명하기 위한 캐릭터로서만 존재하는 배역인데 그걸 시고니 위버가 해주니까 그냥 다 납득됨. 왠지 제노모프들 다 때려잡고 이 기관 채용 되었을 것만 같은 인상.
하여튼 다시 봐도 재밌는 영화였다. 타란티노나 매튜 본이 호러를 만들면 이런 느낌이었을까. 드류 고다드가 이후 만들었던 <배드 타임즈>도 만족스러웠는데 차기작은 언제쯤 만들려고 하나, 이 양반?
덧글
glasmoon 2021/03/29 19:59 # 답글
CINEKOON 2021/04/02 12: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