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01 17:00

자산어보 극장전 (신작)


설경구의 정약전은 일종의 실리주의자처럼 소개된다. 아니, 현실주의자인가? 뭐, 실리가 곧 현실이고 현실이 또 실리로 이어지는 것이니 어쩌면 둘 다라고 하겠다. 정약전을 천거한 정조 역시 그에게 당부하는 것은 오로지 '버티라'는 말 뿐이었다. 국정을 돌보고 신하로서의 도리를 다하여 부국강병을 이룩하라- 따위의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 같은 뻔한 내용이 아니라, 관직 생활 하다보면 앞으로 칼로 베이고 오물을 뒤집어 쓰는 것만 같은 여러 풍파들이 있을지언대 그 모든 걸 그저 묵묵히 버티라는 매우 현실적인 조언. 정말 재밌는 건, 그런 실리주의자이자 현실주의자인 정약전이 천주교인이었다는 데에 있다. 하늘 위의 그 아버지를 단 한 번도 본적 없었을 텐데, 어떻게 실리/현실주의자로서 보지도 듣지도 못한 것을 믿었던 것일까. 

이는 정약전이 느끼기에 조선에서는 하느님이 곧 자유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늘 위에는 유일신이 있고, 그 아래에 사는 인간들은 그저 '인간'일 뿐 차이가 없는 세상. 임금도, 양반도, 상놈도, 노비도 없는 그런 세상. 정약전이 꿈꾸었던 세상은 바로 그런 세상이었고 그에겐 그 꿈이 바로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할 현실이었던 것이다. 근데 한 번 더 웃기게도, 그런 세상을 꿈꿨던 정약전은 끝내 배교 하고야 만다. 그는 결국 모두가 다 죽어나갈 위기 앞에서 순교 대신 배교를 택한다. 단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고자. 그러니까 정약전에게는 사람 사이에 차등을 두지 않는 것과 단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는 것. 이 모든 게 다 자기가 선택했던 바로 그 이상적인 현실이었다는 말이다. 

그랬던 그가 성리학을 필두로한 유교 연구를 제쳐두고 실학의 세계로 뛰어든 것은 일견 타당해 보인다. 임금을 모시고 조상을 모시는 것 대신에, 우리가 사는 세상의 본질을 꿰뚫어보고 또 그걸 연구하는 학문. 백날 공자랑 맹자만 읊으면 뭐하냐고, 정작 우리의 삶을 나아지게 만드는 것은 실학이고 과학인데. 그 시절의 왜놈들이 신무기인 조총을 앞세워 우리 국토를 유린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었잖아. 지극한 실리/현실주의자였던 정약전이 실학과 과학의 본질을 탐구 했던 이유는 이토록 자명하다. 하여튼 그랬던 그가, 흑산도에서 변요한의 창대를 만난다. 나름 양반의 씨를 이어 받아 학구열은 뛰어나지만 제대로된 기회와 깨달음을 얻지못해 잔뜩 움츠려 있던 그. 정약전과 창대는 서로를 변화시켜 나간다. 정약전은 창대에게 글 공부를 가르치는 것으로, 창대는 정약전에게 어부로서 자신의 지식을 전달하는 것으로.

성리학을 비롯한 유교 사상. 아니, 뭐 꼭 유교가 아니더라도 인간 사회와 관계에 분명하게 존재하는 각종 가치관들과 인문학들을 배우는 것은 반드시 장려되어야 하고 또 존중 받아야 한다. 근데 가끔은 그런 강력하고 단단한 헤게모니들이 진정한 변화를 가로막기도 하는 게 현실이지 않나. <자산어보>는 그것을 곧잘 묘사한다. 그 목적이 출세이든, 흡사 홍익인간의 정신이든 간에 일단 당신이 어부고 상놈이면 애초부터 안 된다는 거잖아. 극중 인물들의 말마따나, 옥수수 따위도 종자보다 밭과 흙이 더 중요한 것일진대 당시 조선은 전혀 그런 사회 환경이 아니었으니.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고, 이로운 방식으로 백성들을 돌보고 싶어? 그럼 그냥 성리학 공부해야지 별 수 있나? 나는 진심으로 조선이 과학과 실학을 더 장려하는 평행 우주가 있었더라면 한일병합의 경술국치는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거라 본다. 

어쨌거나 서로가 서로를 변화 시키면서도, 그 과정이 느끼하지 않고 담백하게 묘사되어 좋다. <아티스트>가 그랬듯이 흑백 화면이 가끔은 지나치게 고평가 되고 있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을 종종 하는데, <자산어보>에서 만큼은 그런 느낌이 단 1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흑백의 이분법으로 밀려들어오는 파도와 그걸 묵직하게 비추는 윤슬, 어둔 밤 하늘을 환하게 수놓는 별들 따위의 이미지가 일반적인 컬러 영화들에 비해 더욱 더 파워풀했다. 영화 자체가 정약전이 쓴 책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면 흑백의 수묵화 같은 느낌이거나.

그렇게, 세상을 변화시키는 건 세상의 본질이다. 지구는 둥글고 짱뚱어는 생각보다 맛있다는 바로 그 본질. 그리고 거기에다가, 영화는 그 변화를 완성시키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는 점을 더해 넣는다. 얻어먹으면 갚을 줄 알고, 배웠으면 가르칠 줄도 알고, 끝내는 조금 늦었더라도 지나간 인연을 다시 되찾는 것. 결국 우리를 구하는 건 세상의 본질과 인간의 마음인 것이다.

덧글

  • rumic71 2021/04/02 02:43 # 답글

    과학은 중요하겠지만, 그보다 정치를 제대로 못한 게 큽니다. 실제 일본이 개항을 일찍 해서 과학입국을 한 듯 보이지만 가만 보면 유신 이래 태평양 전쟁 때까지 이르도록 일본군의 행태는 도무지 과학적으로 보이지 않으니까요. 그보다 다른 열강들이 자신을 방해 못하게 교묘한 외교술을 펼친 게 주효할 듯 합니다. 하긴 실리주의가 뿌리내렸으면 이 점은 어느정도 발전했을 듯 하네요. 조선은 그놈의 허장성세가 다 말아먹은 셈이니까요.
  • CINEKOON 2021/04/02 12:37 #

    아, 물론 세상의 모든 일들이 다 그렇듯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 어떤 결과가 나왔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도 조선 후기의 정치는 제대로 못했다 보고요. 그리고 저는 정치나 사상 등을 비롯한 인문학 공부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라... 그러나 어쨌든 조선이 과학의 중요성을 제대로 못 깨치지 않았나 하는 점은 여전히 안타깝더라고요..
댓글 입력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