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작이 되는 게임 이야기는 아직도 못해봤으니 빼고. 폴 앤더슨의 첫번째 실사 영화는 그야말로 無근본의 대 향연이었다. 판타지와 SF 장르의 모양새를 대충 따와 주형틀을 만들고, 거기에 각종 무협 영화의 센스와 오리엔탈리즘을 가득 끼얹은 뒤 믹스했던 작품이었지. 정말 놀라운 건, 이번 리부트에서 그런 無근본적인 감각은 대부분이 거세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여전히 말도 안 되는 세계관인 건 맞음.
원작 게임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소리 하는 게 맹꽁이 같아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건 아무리 봐도 하사시 한조의 스콜피온과 비한의 서브제로 이 두 캐릭터 중심으로 갔어야만 했던 영화다. 포스터에서도 그 둘이 메인인 것처럼 그려지고 있고, 이 영화에서 그나마 좋다고 할 수 있는 15분여의 오프닝 장면도 그 둘의 과거사를 담고 있거든. 아닌 게 아니라 진짜로 오프닝 장면은 나쁘지 않다. 물론 좀 더 파괴적이고 창의적으로 만들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긴 하지만, 그래도 엔딩이 아니라 오프닝에서는 이 정도의 페이스가 맞지. 사나다 히로유키와 조 타슬림의 맨 얼굴을 그대로 전시하며 단검부터 맨주먹까지를 아우르는 액션이 멋지다. 게다가 이 오프닝에 담겨있는 감정과 그로인한 동기가 그나마 이 전체 영화의 맥락들 중 가장 설득력 있게 그려진다. 가족에 대한 복수! 아, 물론 존나 뻔한 거 맞지. 이미 죽은 가족을 위해 복수귀가 되는 주인공 그린 영화들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 이미. 그러니까 내가 말했지, '그나마'라고. 그나마 이 영화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동기가 바로 이 오프닝에서 깔린다니까?
허나 정작 하사시 한조는 이 오프닝에서 죽어버린다. 물론 후반부에 부활하긴 해. 근데 진짜 후반부에 부활함. 영화 끝나기 한 10분 전쯤? 생뚱맞게 부활해 서브제로와 리매치를 벌이거든. 그러니까 바로 이게 문제인 것이다. 간지가 철철 넘치는 두 캐릭터, 여기에 그 둘을 연기한 각각의 배우들도 액션과 연기가 모두 다 되는 유명 배우들이야. 심지어 원작 게임에서도 이 두 캐릭터가 가장 인기 많은 편이라며. 그럼 이 둘로 그냥 듬직하게 갔으면 안 되나? 물론 원작 게임의 팬들이야 난리를 칠 수도 있겠지. 대전 격투 액션 게임의 리메이크인 거니까 다른 캐릭터들도 서로 싸우는 모습 좀 많이 보여달라고 바닥에 누워 땡깡 부릴 수도 있겠지. 거기까지도 다 인정이라 이거다. 그러니까 그냥 스콜피온이랑 서브제로 위주로 하되, 여기에 다른 캐릭터들 살짝 살짝 끼워넣어서 버무리면 됐던 거잖아. 그러나 영화는 초장부터 스콜피온을 죽여버리고, 서브제로는 최종 보스 포지션으로 두어 중반부에 등장하는 것을 막아두었다. 그리고 이 자리를 주인공이랍시고 꿰차 앉은 것이 바로 그 우리들의 콜 영...
콜 영은 정말 더럽게 재미없는 캐릭터다. 하사시 한조의 피를 이어받았단 것 빼고는 별 캐릭터성이 없다. 그냥 납작 하기만 하다. 그에게는 지켜야할 가족이 있다? 뻔한 데다가 잘 살리지도 못했음. 그는 언제나 버티지 못하고 지레 포기하는 캐릭터이므로 성장의 여지가 있다? 그럼 성장하는 순간을 잘 묘사 했어야지, 지금은 그냥 얼렁뚱땅. 아... 그것도 안다. 이런 종류의 영화에서 이야기는 그저 장식일 뿐이란 것을. 그럼 콜 영의 액션은 어떠한데? 스콜피온은 단검을 줄로 감아 휘두르는 액션이 멋지고, 서브제로는 특유의 능력으로 얼음송곳들을 순간적으로 만들어내 그것으로 우위를 점하는 액션이 대단하다. 그럼 콜 영은? 이 새끼는 액션에서도 주인공 답게 굴지를 못한다. 이 놈의 특수 능력이라고 해봤자 요상한 갑옷 두르고 곤봉으로 줘패는 거임. 그 자체로 매력적이지도 못하고, 연출로써 잘 묘사해내지도 못했다. 그냥 여러모로 어정쩡한 놈이 주인공 행세하고 있는 거.
아까 이런 종류의 영화에서 이야기는 그저 장식일 뿐이라고 했었는데, 사실 폴 WS 앤더슨의 <모탈 컴뱃>에 비해서도 그 부분에서 더 형편 없다고 생각한다. 구 <모탈 컴뱃> 역시 여전히 형편없는 이야기를 간신히 붙들고 서 있던 영화였지만, 그럼에도 극중에서 대부분의 세계관 병맛설정들은 다 설명을 해놓았었다. 주인공 캐릭터들 각각에게 부여된 이야기와, '모탈 컴뱃'이라는 이 괴이한 대회에 대해서도 어느정도는 그 기원과 과정을 설명 했었다고. 지구 바깥의 세상에 대해서도 직접적으로 묘사 했었고 말이야. 이에 비해 신 <모탈 컴뱃>은 그냥 다 '그렇다 치자' 식으로 진행된다. 이런 대회가 왜 있는 거고 규칙은 뭔데? 아, 그냥 있다 쳐. 두 팔을 잃은 잭스는 대체 어떤 기술로 사이보그화에 성공한 거야? 아, 그냥 됐다 쳐. 그럼 하사시 한조는 대체 어떤 방법으로 부활한 건데? 아, 그냥 되살아났다 치라고. 그냥 ㄹㅇㅋㅋ만 쳐
뻔한 건 괜찮지만, 액션 오락 영화에서 이야기가 장식이라고 그저 일갈하는 건 다 옹졸한 변명이다. 내가 뭐 크리스토퍼 놀란 급의 플롯 진행을 바라냐? 폴 토마스 앤더슨 느낌의 감정 묘사를 바라? 그거 아니라고. 그냥 이 영화의 오프닝이 보여줬던 정도의 이야기로만 진행해도 된다고. 최소한 앞뒤만 맞고 인물들의 감정만 잘 이해되면 된다고. 뻔해도 된다고. 내가 많은 걸 바라는 거야? 근데 리부트된 <모탈 컴뱃>은 그냥 그걸 할 생각이 없다. 애초에 그게 컨셉이라고 하니 더 할 말이 없긴 한데, 어쨌거나 돈과 시간 쓰며 본 건 나니까 이 정도의 비판은 좀 해도 되는 거겠지.
액션에도 문제가 많다. 하기야, 이 영화 속 액션 장면들에 내가 완전히 불만족한 것은 또 아니다. 앞서 말했듯, 오프닝 액션 장면이 이미 좋거든. 여기에 잭스와 서브제로의 결투도 좋아. 물론 잭스가 거의 일방적으로 발리는 대결이지만, 어쨌거나 서브제로의 다양한 기술들을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만족. 더불어 그 전개가 괴랄하긴 하지만 클라이막스의 마지막 리매치도 좋고. 이거 굳이 따지고 보니까 죄다 스콜피온이랑 서브제로가 관여 되었던 액션들이네. 역시 이 둘이 주인공이라니까? 하여튼 이 세 액션 씬을 빼면 나머지는 그렇게 좋은지 잘 모르겠다. 중후반부 콜 영의 지시에 따라 적들을 갈라놓는 액션 씬들 몽타주는 그 존재 이유를 알 것 같긴 하다. 원작이 대전 격투 액션 게임이니까, 각 캐릭터들이 서로 맞붙는 장면을 조금씩은 보여주어야 하니까 의무감에 넣은 장면들이겠지. 근데 그 액션들이 다 짧기도 하고, 결과가 뻔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또 원작 게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페이탈리티'를 새롭게 리뉴얼해 창의적으로 그린 것도 아니라서 그냥 다 무감각하게 느껴졌음. 특히 사이보그가 된 잭스와 웬 거대망치 장군의 대결은 너무 짧아서 너무 아쉬웠다.
그래도 케이노는 존나 웃기더라. 진짜 한치 앞이 예상되는 잔바리 악당. 처음에 등장할 땐 나중에 개과천선해서 츤츤 거리면서도 주인공 도와주겠거니, 했었는데 그딴 거 없음.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개새끼였다. 적들에게 꼬드김 당하는 것도 존나 어이없어서 웃김. 돈 준다고 하니까 일말의 고민 없이 옳거니-하는 거 웃겼다.
개인적으로 사나다 히로유키를 참 좋아한다. 조 타슬림도 <레이드>와 <검객>에서 이미 눈여겨 봤었지. 스콜피온과 서브제로가 더 매력있게 느껴졌던 건 다 그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좋았지만, 클라이막스에서의 리매치는 둘 다 가면을 쓰고 싸웠기 때문에 일단 스콜피온과 서브제로의 싸움처럼 느껴졌었다. 허나 오프닝의 대결에선 둘 다 가면을 쓰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스콜피온과 서브제로의 싸움이라기 보다는 왠지 동양을 대표하는 두 액션 배우 사나다 히로유키와 조 타슬림의 대결처럼 보여 더 근사했다. 난 언제나 얼굴이 보이는 액션을 선호했다. 그래서 성룡을 좋아했고 아이언맨보다는 늘 언제나 캡틴 아메리카의 편에 서고 싶었다. 얼굴은 곧 감정이다. 그러니까, 액션에서 중요한 것은 싸움의 합이 아니라 언제나 감정이라는 거. 바로 그런 의미에서, 사나다 히로유키와 조 타슬림 만이 온전하게 빛났던 영화.
뱀발 - 구 <모탈 컴뱃>보다 더 과거 수련회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영화였다. 원치 않았는데 강제로 끌려가서 숙소 생활하며 얼차려 받았던 그 기분. 가족 보고 싶다고 징징 대면 실망 했다며 꺼지라고 일갈하는 수련회 교관. 콜 영도 존나 기분 거지 같았겠다.
덧글
dj898 2021/04/14 12:00 # 답글
CINEKOON 2021/04/20 15:3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