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직 폭력배나 갱스터 등을 다룰 때 여러가지 방식이 있다. 그 중 가장 가벼운 건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한국 영화계를 주름 잡았던 조폭 코미디 장르 마냥 그들을 희화화하는 방식이겠지. 이어서, 마틴 스콜세지의 방식 역시 존재한다. 그들과 그들이 속한 세계를 아주 현실적이면서도 비정하게 묘사하는 것. 그들 사이에 우정이나 의리, 진정한 권력 따위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또 존재하지도 못한다는 냉소적 관점. 그리고 바로 이와 대척점에, 기존 박훈정의 방식이 존재한다. 이른바 조폭의 낭만화. 물론 그게 꼭 박훈정 만의 시그니처는 아닐 것이다. 애시당초 그가 나침반으로 삼고 있는 8,90년대 홍콩 느와르들이 다 그랬으니까.
그야말로 조폭들에게는 우정의 교과서였을 <신세계>에 이어, 비록 조폭 느와르는 아니었어도 <대호> 역시 그 안에 낭만성을 간직하고 있는 영화였다. 한반도의 마지막 호랑이를 최민식의 주인공 캐릭터에 대입시켜 일종의 감정적 허무주의로 나아가는 작품이었으니까. 물론 그 두 작품 안에도 낭만화와 더불어 일종의 비정하고 허무한 염세적 관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런 관점보다는 낭만적으로 묘사한 부분들이 더 많았기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 뿐. 그런 믹스 매치는 <V.I.P>에서도 이어졌다. 굉장히 비도덕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V.I.P>는 살인 그 자체의 과정을 낭만화 시킨 작품이었지. 그게 존나 거북했고, 작품 자체도 재미없었다는 게 치명적이었지만.
그리고 그 믹스 매치가, <낙원의 밤>에서 제대로 비틀린다. 이야기는 다른 영화들이 이미 골백 번도 더 했던 것이다. 잘못을 저지른 주인공이 어딘가로 유배되어 숨어있다가 그 곳에서 삶의 끝에 선 한 여자를 만난다는 전개. 그리고 그녀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등지게 된다는 이야기. 재미있는 게, 노골적인 조폭 느와르의 탈을 썼지만 자세히 보면 이거 완전 멜로 드라마의 플롯이라는 거. 심지어 여자 주인공은 불치병까지 걸린 상태임. 이것 참 여러모로 K-멜로 드라마 같은 설정이네.
두 주연배우는 인터뷰를 통해 두 캐릭터의 관계가 사랑 보다는 우정에 좀 더 가까울 것이라 말했다. 그렇다고 내가 쓴 '멜로 드라마'란 표현을 오해하진 말았으면 좋겠다. 우정이나 의리 따위까지도 포함한 넓은 의미의, 넓은 관점의 '멜로 드라마'가 이 영화의 중추란 이야기였다. 어쨌거나 그게 사실 아닌가. 그게 사랑이었든 우정이었든 그 둘의 관계가 이 영화의 핵심이었다는 거. 그럼 그 멜로 드라마를 상세히 묘사하고 또 강화함으로써 영화의 낭만성에 기름을 부었어야지. 허나 <낙원의 밤>은 바로 그 부분에서 큰 실책을 저지른다. 이 둘이 대체 왜 가까워졌는지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뭐, 굳이 변명해보자면 그 둘 다 죽음 가까이에 서 있는 존재들로서 일종의 공감을 갖고 있었다-란 설명이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지. 근데 그런 설정만 붙여놓으면 뭐하냐고. 영화라는 시각 매체라면 모름지기 화면으로 그걸 보여주고 설명 했어야지.
그걸 보여줄 수 있는 포인트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다른 장면에선 몰라도 펜션 앞 벤치에서 나누는 대화 씬과 바다에서 펼쳐지는 데이트 아닌 데이트 씬에서는 그걸 해냈어야 했다. 그렇지만 영화는 그걸 그냥 넘겨버리고야 만다. 펜션 앞 벤치 장면은 뻔한 구도와 편집으로 점철되어 있고, 대사는 이른바 '명대사'를 만들어야겠다는 의무감에 지나치게 절여져 있는 상태. 그 자체로 너무 재미가 없는 거지. 여기에 그 바다 장면? 제대로된 클로즈업이 아예 배분 안 되어 있다. 두 인물이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이 이 영화의 중추였다면, 그 감정을 제대로 수식해줄 수 있는 타이트한 쇼트 사이즈가 더 필요했을 거다. 그러나 이 영화는 바다 장면에서 그 둘에게 와이드한 쇼트 사이즈 만을 고수한다. 제주도라는 공간감은 강조되지만 둘 사이의 감정은 와닿지 못한다.
전여빈의 재연은 고구마를 의인화 시켜 놓은 답답이 캐릭터다. 아무렇게나 반말 찍찍 싸대는 건 이해할 수 있다. 다른 모두가 그녀에게 똑같이 대하니 그녀 역시도 일종의 반동으로써 그럴 수 있는 거지. 허나 상식적인 순간에 이성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고 징징 대는 걸 보는 건 고역이다. 삼촌 죽어서 슬픈 건 알겠는데 너도 죽기 전에 지금 당장 튀어야 한다고. 나 운전 해야해서 술 못 마시니까 자꾸 강제로 권하지 말라고. 위험하니까 어디 가지 말고 여기 잠자코 있으라고. 그러나 그녀는 말을 듣는 순간이 없다. 그래서 현실적이긴 한데, 관객 입장에선 존나 답답해 죽을 지경.
엄태구의 태구는 배우 자체의 순수한 매력으로 보답하려 하지만 역시 그 자체로 재미없는 캐릭터다. 명색이 느와르 영화의 주인공이면서도 자기 뜻대로 해내는 게 뭐가 없다. 누나와 조카도 못 지켜, 상대 조직 두목도 제대로 못 담궈, 내내 속다가 결국 제대로된 복수도 못 이루고 세상 하직하는 주인공인데 이놈 편 먹고 따라가다가는 속 터져 죽을 지경. 결국 후반 추가 시간에 선수 교체 당하듯 주인공 자리를 재연에게 넘겨주고 퇴장. 여기서부터 재연의 권총무쌍이 시작되는데, 어떤 이들은 이 마지막 10분이 제일 좋았다 말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아무런 쾌감이 없는 장면이었다고 생각한다. 존나 답답한 캐릭터로만 조형해놓곤 기껏 따라갔던 주인공은 강판 시킨 뒤 이 캐릭터를 갑자기 주인공이랍시고 쓱 밀어넣는 꼴이 너무 웃겼다. 권총으로 벌이는 액션도 창의적이기는커녕 뻔했고, 악당들은 아무 것도 해보지 못한채 다 죽었다는 점에서 별다른 쾌감도 없었음. 그냥 <마녀>에 이어, 총을 든 여성 캐릭터에 대한 감독의 페티시만이 오롯하게 남은 장면일 뿐.
그럼에도 은근히 터졌던 건 차승원의 마 이사 캐릭터였다. 사실 <독전>에서도 이미 비슷한 모습 보여줬었고, 최근엔 <힘을 내요, 미스터 리>를 통해 실망스러웠기에 별다른 기대를 안 했던 인물이었거든? 근데 제일 웃김. 첫 등장할 때만해도 '이 새끼 진짜 피도 눈물도 없는 순도 100% 또라이 같은데?'라는 생각을 했었다. 나쁘다 못해 미쳐버린 놈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제일 합리적인 네고왕이었다는 게 반전. 특히 마 이사와 양 사장, 그리고 이문식의 박 과장 이 세 명이 부딪히는 중국집 장면은 나름대로 흥미로워 보였다. 물론 그 장면이 재밌다는 건 아닌데, 주인공들의 두 시간짜리 본편보다 이 세 명의 전사가 더 궁금해졌다는 것 정도? 생각해보면 <신세계>의 연변 거지들 역시 그러했다. 이쯤되면 박훈정의 영화들은 전체의 합보다 각 부분들의 디테일에 더 관심이 가게끔 설계되어 있는 것 같네.
하여튼 전체 틀은 굉장히 비정한 톤인데, 그 안엔 또 멜로 드라마적 감수성을 지닌 낭만화가 시도되고 있는 작품. 근데 그 둘은 정반대의 위치에 놓여있는 관점들이잖아. 동쪽과 서쪽 양쪽으로 주구장창 끌어당기다가 다 터져버린 모양새. 두 마리 잡으려다 토끼 둘 다 죽여버린 느낌의 영화. 어찌보면 넷플릭스가 구원한 또 한 편의 한국 영화 아니었나-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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