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19 15:49

아무도 없는 곳 극장전 (신작)


어떤 영화들은 보기 전에 잠깐의 준비 과정이 필요하다. 프랜차이즈 시리즈의 속편을 볼 때는 이전 영화들의 내용이 어땠는지를 마음 속으로 복기 해보아야 하고, 코미디 영화를 볼 때는 몸 전체를 이완시켜두는 게 좋으며, 반대로 공포 영화를 볼 때는 몸 전체에 살짝의 긴장을 불어넣어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곳> 같은 영화들을 보기 전에는, 일종의 감수성 동기화가 필요하다. 아름다운 동시에 서글퍼서 서정적으로 느껴지는 화면과 음악, 다소 뜬구름 잡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야기와 분위기, 지루하되 감미로운 특유의 리듬과 편집 등. 이런 종류의 독립 영화들을 볼 때 그 정도의 준비 과정은 참으로 이로울 것이다.

근데 반전은, 내 딴엔 그런 준비 과정들을 충분히 거쳤음에도 영화가 그 기준을 아득히 초월해버릴 정도로 지나쳤다는 것. 애초 김종관 감독의 연출 스타일을 알고 있었기에 어느 정도 더 각오 하고는 있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외국 생활을 하다 모종의 이유를 품은채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 소설가. 그리고 그 소설가가 며칠동안 만나게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챕터 형식으로 그리고 있는 <아무도 없는 곳>은 종종 그 스타일에 스스로 취해 비틀 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아, 그렇다고 오해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나도 이런 서정적인 영화들 좋아한다. 나른하게 늘어지는 분위기의 우디 앨런 영화들도 좋아하고, <한 여름의 판타지아>처럼 느리고 꼼꼼한 영화들도 즐겨 본다고. 그러나 이상하게도 <아무도 없는 곳>만큼은 재미있게 볼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영화에 있어서 예쁜 화면은 물론 중요하다. 그리고 김종관은 그 계열 끝판왕 같은 사람이다. 그는 프레임 안에 제철의 계절감을 불어넣을 줄 아는 감독이고, 또 길가에 고인 물 웅덩이 만으로도 아름다운 이미지를 뽑아낼 수 있는 연출가다. 그러나 종종 그는 그것만을 쫓느라 정작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모호하게, 때로는 몽롱하게 뭉뚱그리고 만다. 최근작인 <조제>가 딱 그랬다. 두 인물 사이의 감정과 그 변화가 가장 중요할 멜로 드라마란 장르에서도, 김종관은 그것을 꼼꼼하게 그려내는 대신 시종일관 예쁘고 감각적인 화면 안에 그들을 던져놓는 것에만 집중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도 없는 곳>은 어찌보면 더하다. 주인공 창석의 과거와 나름의 미스테리는 화면 바깥에만 존재하는데, 그마저도 알쏭달쏭한 방식으로만 표현된다. 물론 그게 나쁜 것은 아니다. 때때로 영화는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소설가로서 만난 그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서로 잘 달라붙은 상태로 단 한 가지 주제를 향해 달음박질 하고 있는가-의 관점에서 보면, <아무도 없는 곳>은 그저 산만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산만한 이야기에 미스테리 마저 알쏭달쏭하게 끼얹었으니 더 두루뭉술하게만 보이는 게 사실이고.

첫번째 챕터에는 일종의 환상 묘사가 존재한다. 근데 이후 두번째, 세번째, 네번째 챕터에는 또 그런 묘사가 없다. 이런 부분에서의 통일성도 잘 갖춰져 있지 않은 것이다. 뭐, 챕터 형식을 가진 영화가 무조건적으로 모든 챕터의 형식에 공통성을 지니고 있을 필요도 없긴 하지만 그래도 난 좀 신경 쓰이더라고. 여기에 소설가를 주인공으로 둔 영화답게 챕터 별로 소설과 시 등의 문학 등에 대한 코멘트들도 존재하기는 하는데, 이것도 <패터슨> 만큼 잘 쓰고 있는 것 같진 않아보이기도 하고.

화면이 예쁜 건 인정한다. 그러나 그 예쁜 화면들에게는 일종의 리듬이 필요하다. 이건 회화나 사진이 아니라 영화잖나. 그럼 관객과 보폭을 잘 맞춰 걸어줘야지. 혼자 자기 멋대로 달릴 거라면 관객들이 안 따라가고는 못 배기게 존나 재밌든지. 허나 내 마음은 <아무도 없는 곳>에게 나의 종종걸음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름 감수성 수치 동률 만든다고 작정한 뒤 본 영화였는데 그냥 지루하기만 했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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