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19 17:45

서복 극장전 (신작)


깔게 너무 많아서 지금 좀 난감한데.

<불신지옥>과 <건축학개론>이라는 정반대의 장르 영화로 한국 영화계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이용주 감독의 신작. 어쩌면 바로 그 때문에, 나는 <서복>을 더 기대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하나 하나 뜯어보면 새로울 거라곤 전혀 없는 이야기처럼 느껴졌던 것이 사실인데도, 이용주라는 이름 때문에 일종의 환각 상태에 빠져있었던 것. 이렇게 아니면 설명할 길이 없었던 기이한 기대감이었다. 왜냐면 예고편 공개 당시에, 나는 이거 정말로 뻔하디 뻔할 수 밖에 없는 영화라고 예상 했었거든. 도입부부터 시작해 중간 전개, 디테일한 브로맨스 묘사, 심지어는 결말까지 작두라도 탄 것인양 다 맞출 수 있을 것 같았거든. 그러니까 평소라면 기대는 커녕 절대 안 보고 싶었을 영화인데 딱 감독 이름 석자 때문에 그래도 뭔가 다르겠지 싶었던 거.

냉정히 말해, 대체 이 영화만의 새로움이 뭔지 전혀 모르겠다. 초능력을 가진 소년 또는 소녀를 구하고 또 지켜야하는 플롯은 이미 <엑스맨 - 최후의 전쟁>과 <로건>, <기묘한 이야기>, 심지어는 최근 <승리호>에서도 반복되었던 뻔한 구조였다. 여기에 복제인간을 소재로 삼는다? 이것 역시 결코 <블레이드 러너>와 <아일랜드>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지. 가족을 잃은 중년 남자와 체제에 복속되어 있던 잘생긴 젊은이의 브로맨스? 결은 다르지만 <의형제>가 훨씬 더 잘했음. 게다가 막판에는 염동력을 기본으로 한 한바탕 대소동도 일어나는데, 여기서 <아키라>가 안 떠오르면 그건 거짓말인 거고. 심지어 영화 내에서 자주 묘사되는 염동력 묘사 역시 이미 다 <엑스맨> 시리즈와 <기묘한 이야기> 등에서 죄다 봤던 방식이었다.

뼈대가 되는 큰 그림부터 세세한 밑그림까지, 그 어느 것 하나 이 영화 만의 오리지널리티가 없다. 그러나, 내가 언제나 옹호해왔듯 장르 영화란 게 으레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다 어디서 봤음직한 것들 가져다가 우라까이로 때려박는다 해도 기본적으로 잘 만들기만 한다면 재미는 그저 따라오는 것. 그게 바로 장르 영화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오리지널리티가 없는 것은 약점일지언정 죄가 아니다. 문제는, 영화의 기본적인 재미도 싹 다 엿바꿔 팔아먹은 게 <서복>이라는 거지.

보통 복제인간을 소재로 하면 정체성에 대한 고찰을 주제로 삼기 마련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것만으론 성에 차지 않았는지, 여기에 불멸이라는 소재를 더해 삶과 죽음까지 논한다. 그래, 그럴 수 있다. 장르 영화 만큼 메시지를 담기에 좋은 그릇이 또 없지. 그러나 영화는 그걸 모조리 직접적인 대사로 다 때운다. 죽음을 목전에 둔 남자와 영원히 죽지 않는 남자를 함께 붙여놨으면, 그것 자체로 굉장히 노골적인 조합인 거잖아? 그럼 더더욱 에둘러 표현 했어야지. 이미 노골적인 구도인데 여기에 더 노골적인 대사와 더욱 더 노골적인 상황으로 삶과 죽음을 노래한다. 웃긴 건 대사도 죄다 문어체에 가까움. 삶과 죽음을 직접적으로 발성하고 또 논하는 끝없는 대사들과 더불어, '말미암아'라든지 '초거대 국가 기밀 프로젝트' 따위의 평소 우리가 잘 쓰지 않는 말들 내지는 유치한 표현들을 미친듯이 갖다 쓴다. 

두 남자의 로드 무비고, 그 안에서 피어나는 브로맨스가 핵심인 영화면 그 둘 사이에 여러 재밌는 상황과 대사들을 많이 넣어줬어야지. 여기에 염동력을 가진 불멸의 소년? 그럼 그 상황과 대사들은 현실적이면 현실적일 수록 더 재밌겠지. 그렇지만 <서복>은 또 그 반대로 간다. 둘이 인간적인 대화를 하는 건 기껏해야 컵라면 먹을 때 정도고, 나머지 차 안에서 펼쳐지는 세네번의 대화들은 모두 삶과 죽음 타령의 돌림노래. 이 대화 장면과 저 대화 장면이 전혀 구분되지 않는다. 아까 그 자동차 내부 장면에서 무슨 이야기했지? 아, 삶과 죽음에 대해 논했지. 그럼 지금 이 두번째 자동차 내부 장면에서는 무슨 대화하고 있지? 아, 또 삶과 죽음에 대해 논하고 있구나. 에라이, 염병.

존나 단순하지만, 기업과 과학자들이 불멸의 존재를 만들어낸 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과학적인 건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이 서복이라는 녀석의 골수를 채취하면 인류가 앓고 있는 대부분의 질병들이 모두 정복 가능하다는 거잖아? 그럼 일단 돈이 되겠네. 여기에 노쇠해 죽음의 문턱 앞에 서 있는 기업 회장님 역시 그 혜택을 보실 거고. 이처럼, 서복을 탄생시킨 이유는 뻔하되 납득 가능하다. 근데 이에 반대해 서복을 죽이려는 사람들도 있거들랑. 조우진의 안 부장이 이끄는 국정원이 그렇지. 그럼 얘네는 왜 서복을 죽이려는 건데? 그건 바로 안 부장이 미국 과학자에게 설득 되었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그 설득의 주요 논지가, '죽음이 사라지면 인간들은 다 대충 살기 시작할 거임'이었음.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시발 지금 장난쳐? 죽음이 없는 인류는 욕망 덩어리가 될 것이니 서복을 죽여야 한다고? 그리고 이 이유에 국정원의 부장이 설득된다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존나 맞는 말이긴 한데 그걸 이렇게 직접적으롴ㅋㅋㅋㅋㅋㅋㅋㅋ 미국이 불멸의 복제인간을 없애고 싶은 이유갘ㅋㅋㅋㅋㅋㅋ 탐나서가 아니라 철학적 이유 때문이었엌ㅋㅋㅋㅋㅋㅋ 진짜 올해 최고의 코미디다.

그리고 끝없이 골수 채취할 대상이었다면 애초 왜 인간과 비슷한 형태여야 하는 건데? 인간 수준의 높은 지능이나 인격은 아예 배제한채로 만드는 게 과학자들에게도 더 쉽지 않았을까? 그 누워있던 돼지처럼. 그게 불가능 하면 그냥 냉동인간 마냥 얼려두거나 계속 약 투여해 잠재워두는 건? 그게 골수 채취하는 데에도 더 쉽고, 여러 도덕적 문제점들을 타파하는 데에도 더 낫지 않았겠어? 심지어 예상치 못했지만 염동력까지 생겼잖아. 그럼 그 위험성 때문에라도 그냥 얼려두는 게 낫지. 왜 굳이 인간 형태와 지능을 지닌 존재로 만든 건데? 잃어버린 아들의 존재를 다시 되찾기 위해서? 아니면 그냥 영화 막판에 "얘랑 뭐 정이라도 드셨어요?"라는 대사 한 줄을 치기 위해서? 근데 또 생각해보니 염동력도 의도한 게 아니라 어쩌다 얻어걸린 거라네. 각본 쓰기 참 쉽다. 

블록버스터로 포장된 것과는 다르게, 액션의 물리적인 양도 부족할 뿐만 아니라 그 질도 형편없다. 막말로 미국에서 제작한 초기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들 같았다. 사실 액션 별로 없으면서 영화의 양감 부풀리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그런. 중반부에 밝혀지는 미국 용병 집단의 반전 아닌 반전도 어이가 없고, 서복의 초능력을 활용한 액션들도 이미 말했듯 다 어디서 본 것들의 리바이벌. 여기에 나름 국정원 출신이면서 총을 든 상대에게 포크로 맞서는 주인공의 모습에 실소. 민기헌과 서복이 차근차근 밟아가는 브로맨스의 과정과 그 스텝 역시 다 뻔하기 그지 없고, 장영남의 캐릭터도 어디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건너온 허세 갑 캐릭터라 터무니 없어 뵌다. 사실 이 캐릭터는 있으나 마나 한 인물이었는데, 막판 서복의 폭주를 위해 노골적으로 심어둔 캐릭터였단 점에서 또 어이가 없고. 없는 게 참 많네, 이 영화.

대체 뭘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지 조차 이제는 잘 모르겠다. 그냥 막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이게 영화의 결말인가? 죽음을 목전에 둔 주인공 앞에다 두고 그게 할 소리냐? 이야기는 뻔해, 캐릭터들은 매력 없어, 액션은 전무하고, 주제는 많아서 흘러 넘치네. 보는내내 언제 끝나는지 시계만 봤다. 나 이거 티빙 결제해서 본 거거든? 결국 남은 건 이미 결제 해놓은 티빙 한 달 이용권 뿐. <서복>은 핑계고 결제한 김에 이걸로 그냥 tvn 예능이나 몰아서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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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로그온티어 2021/05/21 02:29 # 삭제 답글

    이 감독분의 심리를 제가 잘 알 수는 없지만, 이런 것 같아요. 소원을 이룬 느낌? 깊은 인상을 받았기에 시도를 하고 싶었지만 전혀 새로울 것 없었던 요소들을 전부 끌어모아 작품을 만든 겁니다. 지금밖에 기회없고, 돈을 대줄만한 곳은 넷플릭스라, 이때가 기회다 싶은 거죠. 작품에 총집합시켜 놓고 하고싶은 걸 다한 겁니다. 관객의 심정은 어떨 지 몰라도, 감독 입장에서는 하고 싶었던 거 다 집어 넣어서 속이 후련하지 않을까.

    이런 작품이 필요하다고는 생각해요. 다음 작품을 만들기 전에 마음의 똥(...)들을 내려놓거나 버리지 않으면 그 똥들이 일으키는 똥독들이 다음 작품활동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은 그런 똥과 같은 작품이고, 이용주씨는 차기작에서 획기적인 작품을 들고 돌아올 겁니다.

    그렇게 믿어야 합니다. 안 믿으면 불신지옥에 갈 거에요.
  • CINEKOON 2021/05/24 14:01 #

    ...... 그러니까 차기작을 기대하는 게 좋겠단 말씀이시죠?

    혹시 이용주 감독님 본인이신가요?
  • 로그온티어 2021/06/06 05:03 # 삭제

    (뜨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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