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21 11:42

러브 앤 몬스터스 극장전 (신작)


인류 붕괴라고 하면 소행성 충돌 같은 묵시록적 간지를 지닌 사건으로 시작될 줄 알았다. 그러나 소행성 충돌을 가까스로 막아낸 인류에게 부여된 건, 그동안 손바닥 마주치는 걸로 쉽게 잡아온 각종 벌레들의 습격. 소행성을 파괴하기 위해 인류가 쏘아올린 미사일들은 지구 대기에 갖가지 방사능을 남겼고, 이에 곤충과 파충류 등이 응답했다. 거대화 된 바퀴벌레가 군대의 탱크를 통조림 먹듯 따고, 집채만큼 커버린 게가 사람들을 마구 밟고 다녀 혼란스러운 상황. 이에 주인공을 비롯한 남은 인류가 택한 선택지는 스스로가 바퀴벌레처럼 숨어드는 것이었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 나라면 생존자들의 벙커를 결코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한 두 번 방어가 뚫렸다고는 해도 거기엔 서로가 서로를 아껴주는 좋은 사람들이 있었고, 무엇보다 위험한 바깥 세상에 비하면 왠지 모를 아늑함 같은 것이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러나 주인공은 벙커 바깥으로 나선다. 그것도 톰 크루즈 타입의 용감무쌍한 주인공이 아닌데도 말이다. 그는 오히려 겁많고 소심한 데다 나약하기 까지 한 인물이다. 그런 그가 안전해보이는 곳을 떠나 굳이 위험한 세상으로 발걸음을 내딛는다. 대체 왜? 납득이 안 가잖아, 납득이. 왜긴 왜야, 사랑 때문이래. 사랑? 응, 사랑. 제기랄, 그럼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정'이나 '사랑' 따위는 너무나도 흔하게 여겨지는 감정이다. 그래서 때때로는 그것을 소리내어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손가락이 오그라들고, 그걸 듣는 상대는 고개를 돌려버리게 된다. 허나 '사랑'은 그 보편성 때문에 너무나도 평가절하 되고 있는 단어이자 감정이다. 더 좋은 곳을 찾기 위해 주인공이 길을 나선다? 납득 안 되지. 자신의 용맹함을 증명하기 위해 주인공이 여정에 오른다? 여전히 납득 불가. 그러나 뻔하더라도 그 이유가 사랑 때문이라면? 세상의 끝에서 자신의 사랑을 찾겠노라고 스스로에게 약속한 주인공이라면? 그럼 납득은 물론 설복 당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사랑은 언제나 치트키 같은 감정이기에.

나름 포스트 아포칼립스 상황을 다루는 이야기임에도 그 규모로 젠체하지 않는 영화라 좋다. 가렛 에드워즈의 초기작인 <몬스터즈>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데, 물론 그것보다는 돈을 좀 더 들인 영화이긴 하지. 그래도 어쨌거나 <몬스터즈> 특유의 차분한 분위기와, 이 영화 특유의 키치한 톤이 잘 맞아떨어진 인상. 설정만 들으면 거의 재앙 수준의 미래인데도 영화는 소규모의 어드벤쳐 혹은 생존 영화처럼 그려지고 있다. '사랑'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다룸에 있어서는 썩 괜찮은 세트 규모라 하겠다. 

사랑을 찾아 떠나는 일종의 로드 무비로 볼 수도 있을 텐데, 아닌 게 아니라 주인공이 자신의 여정 사이사이에 만나게 되는 인물들 구성과 그 활용도가 맘에 든다. 가장 처음 만나게 되는 개 보이는 <나는 전설이다>의 그것을 떠올리게 하며 비슷한 장르의 타 영화들 클리셰를 재미있게 리바이벌 함. 이어서는 생존 능력 갑인 유사 부녀 관계 콤비를 만나게 되는데, 캐스팅이 마이클 루커인지라 영화 끝까지 셋이 함께 다니려나 보다- 했었는데 그 예상 그냥 빗나감. 뭔가 묘한 느낌의 쿨함이 이 영화에 있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또 서로 헤어져서 멀어지는 뒷모습을 참 아련하게 그리기도 했음. 거기에 연출적으로 뭔가를 더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냥 캐릭터들 조형이 좋고 그 조합 역시 괜찮으니 그들끼리 그냥 헤어지기만 해도 감정 이입이 막 되어버린다는 이야기.

지하에 숨어 사는 이 영화 속 사람들처럼, 대개의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 마음을 숨기기에 급급하다. 용기가 없어서, 상황이 좋지 않아서, 분명 거절 당할 것이 뻔해서 등등. 물론 거절 당할 수 있다. 기대는 무참히 꺾이고 관계는 상전벽해의 처지에 놓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젠가 한 번 이야기했듯,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시도의 힘이다. 클라이드도 말하지 않나, 탁월한 본능은 실수를 통해 키우는 법이라고. 그러니까 할까 말까 할 땐 해야한다. 더이상 숨기지 말고 바깥으로 꺼내놔야 한다. 이 영화 속 결말의 사람들처럼. 

여러모로 사랑으로 한뼘 더. 사랑으로 한뼘 더 가까워지기 위해 길을 나섰고, 또 그 여정과 결말 속 사랑으로 인해 한뼘 더 성장하게 되는. 오랜만에 보는 순수한 모험 영화. 그래, 순수해서 더 좋았던 거야.

덧글

  • dj898 2021/04/22 09:23 # 답글

    빌빌한 주인공이 사랑 때문에 안전한 벙커를 떠난다. 여기서 이미 현실감 상실~
    실제로 자기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데 사랑이 밥먹여줌~? ㅋㅋㅋ
  • CINEKOON 2021/05/09 14:28 #

    Survive 보다 Live 하고 싶었나 보죠
  • 싸바 2021/06/27 19:39 # 삭제 답글

    본문도 잘 읽었지만 댓글이 머리를 후려치는군요. 생존에 급급할 수밖에 없는 요즘이라 더 그랬나 봅니다. 좋은 영화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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