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23 14:31

내일의 기억 극장전 (신작)


영화는 비슷한 장르의 이야기들이 으레 그렇듯이, 불의의 사고로 기억을 잃은채 병실 침대에서 깨어나는 주인공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기억을 잃은 그녀에겐 비록 초면처럼 느껴지기는 해도 친절하고 다정한 남편이 있고, 익숙하지 않기는 해도 그럴 듯한 집을 가진 그럴 듯한 신혼 생활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남편이라는 작자는 수상한 행동을 보이고, 여기에 주인공 그녀의 아파트에도 이런저런 수상한 일들이 생기기 시작한다. 


열려라, 스포천국!


그러니까, 이건 장르적인 선언이다. 스릴러로써 조금 뻔하더라도 잘 짜여진 무언가를 보여주겠다는 선언. 익숙한 설정들로 열어젖힌 영화인 만큼, 이후 전개에 있어서는 관객들이 쉬이 눈치채지 못하게끔 야바위 한 판 제대로 벌여보겠다는 거지. 그럼 관객으로선 기대하게 된다. 클리셰들을 잔뜩 가져다가 썼으니, 이후엔 뭔가 새롭거나 대단한 걸 보여주겠지?

일단 스릴러 장르로써 최소한 낙제점 받을 만한 영화인 것은 아니다. 리듬과 호흡은 꽝이고 새로움이랄 게 전혀 없는 영화인 건 맞지만 나름의 설득력 있는 반전이 존재하고, 또 영화가 무얼 하고 싶었는지 역시 잘 알 것 같기 때문이다. 전반부의 주인공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싸이코메트리 능력처럼 보이는 어떠한 것이다.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는 한 어린 소녀, 그리고 한 여중생이 짧게는 1분 뒤나 길게는 며칠 뒤에 겪게 될 비극들. 그 비극의 잔상들이 주인공 수진의 기억을 맴돈다. 수진은 이를 막으려고 하고, 대개는 성공하지만 때때로 또 실패한다. 근데 이게 왜 나왔어? 수상쩍은 남편의 이야기와는 전혀 별개의 이야기처럼 느껴지는데? 첫번째 반전은 이러하다. 알고보니 이 소녀와 여중생은 모두 수진의 과거였고, 수진은 자신이 겪은 그 과거의 트라우마들을 기억 바깥으로 내몬 뒤 타자화 시켜 마치 남의 이야기였던 것인양 목격하게 되었던 것. 그리고 이 반전 아닌 반전은 이후 수진의 남편이 숨기려 드는 미스테리와도 직접적으로 연관 지어 설명된다. 

다시 말해, 뭘 하려고 했던 것인지는 알겠다. 불행한 삶을 살았던 한 여성의 과거를 주인공의 눈을 통해 관객들이 직접 목도하게끔 함으로써 그 비극성을 실제로 경험하게 하려는. 그리고 그로인해 남편처럼 보이는 지훈과 주인공 수진이 얼마나 슬프고 아릿한 과거사로 엮여있는지를 보여주려는. 그래서 그를통해 영화의 핵심 감정과 장르적 반전을 함께 가져가려는. 그 의도는 잘 알겠다고. 그리고 그 의도가 썩 마음에 들기는 했다.

문제는 교통 정리가 전혀 되지 않는단 것이다. 너무 말도 안 되게 늘어져서 지루했던 전반부의 호흡이, 후반부 들어선 조급증에 급해져서 다른 의미로 무너진다. 반전이랍시고 제시되는 숨겨져있던 설정들은 연속적으로 튀어나와 관객으로서 이야기의 맥을 제대로 짚지 못하게끔 만들고, 그마저도 어느 순간엔 너무 뻔하고 빤해 질린다는 느낌이 들 정도. 영화를 다 보고나서 이게 대체 모두 다 무슨 일이었는지를 정리하는 데에 역시 한참이 걸린다. 아닌 게 아니라, 극장에서 보는 동안엔 <테넷>만큼 어려운 영화란 생각도 들었으니 말 다했다.

그냥 막 갖다붙인 전개나 묘사들도 너무 많다. 수진의 진짜 남편이 겪은 사채업자 묘사는 전형적이다 못해 고루할 지경이고, 강철중 스타일로 지루하게 밀어붙이는 형사의 이미지는 너무 뻔해 목을 못 가누게 만든다. 그래도 이런 부분들은 클리셰라는 변명 아래 무시하고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경찰에 체포된 지훈이 경찰서를 탈출하는 장면은? 세상에 대체 어느 형사나 경찰이 자백까지 마친 주요 용의자를 혼자 두고 방을 나서냐? 심지어 방문도 열어놓고 나갔다. 거기에 자기 자동차 열쇠가 들어있는 자켓까지 친절하게 벗어두고 나갔다니까? 이것 뿐만 아니라, 전반부에 벌어지는 가스 폭발 화재 사고 역시 너무 대충 묘사되어 반전의 묘미를 해치고. 하여튼 말도 안 되는 게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가장 큰 단점. 바로 영화의 기술적 만듦새. 후반부 들어서는 조금 나아지는 모양새지만, 영화의 전반부는 그야말로 끔찍하다. 아역배우들은 표정부터 대사까지 연기 조율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듯한 인상이고, 시종일관 들이대는 서예지의 클로즈업은 최근 논란을 차치 하고서 라도 그 자체로 너무나 부담스러워 관객들에게 다른 의미의 공포감을 제공한다. 타이트한 쇼트 사이즈와 와이드한 쇼트 사이즈를 어떻게 배분할지 모르는듯 해 관객들의 감정적 공감을 해치기도 하고, 주인공 부부의 아파트 신혼 집부터 엘리베이터 내부까지 뭔가 다 조악하게만 느껴진다. 막말로 영화가 아니라 TV 단막극처럼 느껴지는 룩이랄까. 거짓말이 아니라, 어린 소녀가 트럭에 치일 뻔한 장면에서는 극장에서 나 혼자 너무 크게 웃어 지레 놀랐다. 그 정도로 뻔하고 조악했음.

여기에 주인공 부부가 알고보니 입양으로 이루어진 남매였단 반전이 곁들여지는데, 이 키다리 아저씨 판타지를 위해 영화는 또 신파를 남발하며 스스로 무너져 버린다. 항상 하는 이야기지만, 신파라고 해서 무조건 싫은 게 아니다. 적당히 잘 쓴 신파는 언제나 환영이다. 그러나 이토록 밑도 끝도 없이 슬퍼지기를 강요하면 난감하다. 오로지 주인공 수진을 울게 하기 위해서 지훈은 말도 안 되는 영화적 동선으로 그녀에게 달려가 최후의 희생을 실행한다. 여기에 진짜 짜증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난잡한 에필로그는 덤. 

기초 설정은 분명 나쁘지 않았으나, 그걸 담아내려는 기술적 노력과 이야기 정리가 한없이 부족했던 작품. 영화에서 언제나 중요한 것은 좋은 이야기지만, 어쨌거나 좋은 이야기 하나만으로는 영화가 제대로 성립되지 않는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또 한 번 몸소 증명해내는 작품. 근데 진짜 아닌 게 아니라 보는내내 서예지 클로즈업이 너무 많이 나오고 지나치게 타이트해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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