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27 17:05

혈의 누, 2005 대여점 (구작)


장르물은 일정부분 클리셰의 집합으로 만들어진다. 달리 말하면 그만큼 뻔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장르물이란 소리고, 때문에 90%가 뻔해도 뭔가 새로운 10%가 있거나 그 장르의 기본적인 재미에만 충실하다면 어느정도 본전은 뽑을 수 있다는 것. <혈의 누>가 가진 강점 역시 바로 거기에 있다. 연쇄 살인 사건을 소재로 다루는데 을사오적 마냥 주요 타겟들이 이미 정해져있고, 여기에 공간적 배경은 또 고립된 섬이야. 여기까진 다 뻔하지, 그 자체로 장르 공식이니까. 하지만 <혈의 누>는 여기에 조선시대라는 시간적 배경으로 승부수를 끼얹는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한 수사물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2005년 개봉 당시 한국 영화계 내에서 이만한 임팩트를 주는 영화가 없었던 건 또 사실이잖나.

불특정다수를 상대로하는 무작위성의 연쇄 살인이 아니라, 특정한 동기로 발동된 확정 타겟의 연쇄 살인이라는 점은 흥미롭다. '죽여야할 사람이 있다'라는 건 그만큼 동기가 강하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곧 이야기가 감정적인 결말로 귀결될 것임을 암시한다. 여기에 <혈의 누>가 선택한 것은 조선시대라는 시대적 배경이었으니, 어떻게 보면 불합리가 판을 쳤던 당 시대에 대한 모순이 중점이라는 걸 영화는 처음부터 드러낸 셈이다. 그리고 보통 이런 종류의 사적복수를 다루는 수사물에서는 주인공 역시 그 사건에 어느정도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경우가 많거든. 김전일이나 코난, 에르큘 포와로처럼 시리즈화 되어버린 탐정들이야 그렇지 않겠지만. 그래도 고립된 섬에서의 살인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외부로부터 유입된 조사관이니 하여튼 각본 짜는 입장에서는 사건과 연관 짓기 딱 좋은 상황인 것이다.

때문에 영화의 주요 미스테리와 그 베이스가 되어주는 감정적 요소들은 재미있다. 현대극에 비해 예산이 더 들 수 밖에 없는 시대극 임에도 수사물로써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 폭력적인 고어 묘사에 힘 썼다는 점 역시 특기할 만하다. 잔인한 묘사 다 뺐으면 지금 버전의 씁쓸한 진혼곡 같은 느낌은 아무래도 덜 했을 것. 다만 첫 살인사건 피해자의 꿰뚫린 목은 뭐랄까, 너무 가짜 느낌이 확 들었다고 해야할까? 그래도 이후 거열형 묘사가 꽤나 사실적이었으니 그건 또 그거대로 됐다. 그리고 미스테리의 구조도 나쁘지 않음. 오프닝에서부터 웬 여자가 냅다 뛰어내리길래 너무 많이 보여주는 거 아닌가 싶었지만 그럼에도 사건의 전체 구조도를 한 번에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니까 적절히 기본기는 잘 해낸 영화라고 해야겠지. 가짜 범인도 나름대로 잘 세웠고.

그런데도 정말 웃긴 건, 영화가 중후반부터 지루해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재미없는 영화인 것은 아니다. 중반부까지는 장르적인 힘으로 잘 굴러가는 영화다. 근데 딱 후반이 되니, 더 이상 내 눈길을 잡아끌지는 못하는 상황이 되더라고. 이어지는 살인 트릭들 관련 동선이 너무 사기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무엇보다 범인과 수사관 사이의 지적 갈등이 너무 느슨함. 둘이 대가리 오지게 굴려서 그걸로 싸웠어야 했는데, 지금 버전에서의 수사관 주인공은 너무 뻘짓을 많이 하는 느낌이다. 두 번이나 찾아갔던 무당 집도 미스테리의 본질을 알고 나면 왜 나왔는지 이해는 가지만 그럼에도 너무 지루하게 묘사되고. 

뭘 얘기하고 싶었는지 역시 알겠는데, 뒤로 갈수록 현실적이라 지적인 연쇄 살인의 느낌보다 특유의 그 영적인 요소가 더 많이 끼어드는 것 같아서... 물론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이상 그 시대적 배경을 잘 살릴 요소로써 끼워넣은 것이었겠지만 내가 워낙 이런 종류의 미스테리를 별로 안 좋아 하는지라... 하여튼 미스테리 구조도 자체는 나쁘지 않았는데 점차 그 진실이 밝혀지기 시작 하면서 부터 지루 해졌다는 소리. 특히 진범의 과거사를 구구절절 회상으로 표현해내는 시퀀스는 그 지루함의 극치처럼 느껴졌다.

여러모로 장르의 가능성만을 엿본 영화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지막도 존나 강렬 하기는 한데 어떤 지적인 연쇄 살인 수사극 느낌이 아니라 일종의 집단 광기에 대한 이야기로 새는 것 같아서 개인적으로는 좀 난감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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