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4/28 12:11

섀도우 클라우드 극장전 (신작)


어디 가서 재밌게 봤다고 하기에는 좀 민망한데 어쨌거나 개인적으로는 좀 재밌게 본 영화. 처음엔 하늘을 배경으로 한 <에일리언>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크리처 나오는 <데쓰 프루프>에 더 가까운 영화였음.


스포일러 클라우드!


제 2차 세계대전 당시의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는 비행기 내부에서 괴물과 벌이는 사투라. 그러다보니 <에일리언>이 안 떠오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 설정은 뻔하지. 크리처 물인데 그 크리처를 주인공과 좁아터진 한 공간에 가둬놓겠다는 거잖아. 언제나 말했듯, 색다른 변주 없이 그대로만 동어반복하는 장르 영화였다면 존나 재밌게 잘 만든 것이 아닌 이상 옹호해줄 이유가 없었다. 최소한의 노력은 해줘야 한다니까? 그런데 이 영화엔 의외성이 많았다. 각기다른 영화들이 레퍼런스로 떠오르는 장면과 설정들로 영화가 나름의 노력을 했던 것만 같았다.

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남성들로 가득찬 군용기에 여성 주인공이 홀로 들어서면서부터 영화는 나름의 젠더 갈등을 묘사한다. 온갖 무시와 성희롱 등이 난무하는 군용기 내부. 잘 만든 영화들이 으레 그렇듯, 나는 남자인데도 이 영화의 여성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할 수 밖에 없었다. 여자라고 어떻게 저런 말을 대놓고 할 수 있을까- 싶은 대사들이 속출. 그래서 분통 터지기 일보 직전인 주인공에게 참 마음이 갔다. 그러다 영화는 군용기 아래쪽에 설치되어 있는 하부 터렛으로 주인공을 옮긴다. 좁아터진 군용기에서 더 좁아터진 터렛으로 영화의 배경이 함께 옮겨가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폰부스>나 <더 월> 따위를 떠올리게 만든다. 각각의 사연을 쥐어줄 것만 같았던 다른 남성 캐릭터들은 모두 무전기 내부 음성으로만 표현되고, 여기에 반응하는 주인공의 표정만을 영화가 가득 채운다. 바로 그게 좋았다. 영화가 시도한 일종의 변주.

비좁은 터렛 안에서 주인공은 이 영화의 크리처인 그렘린과 단기간 사투를 벌인다. 사실 그 둘의 전투 혹은 대결이 많이 나오는 영화인 것은 아니다. 아무래도 한정적인 공간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다 보니 액션보다는 무전기로 대화하는 그 상황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음. 주인공은 계속 그렘린을 봤다고 말하고, 이에 다른 남성 캐릭터들이 믿어주지 않는 것으로 이야기가 흐른다. 여기에 주인공이 갖고 탄 가방 안의 기밀품목에 대한 작은 미스테리도 존재하고.

그동안의 영화나 게임 매체 등을 통해 '그렘린'이란 존재에 대해선 잘 알고 있었지만, 그 기원이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군용기 파일럿들의 목격담이었던 것은 까맣게 몰랐었다. 영화에서 별다른 설명없이 그렘린 바로 던지길래 다 보고나서 검색 좀 해봤더니 실제로 그런 기록들이 많더구만. 비행기에 스리슬쩍 올라타 프로펠러나 엔진 등의 기계 장치들을 마구 고장내 결국 추락 시킨다는 괴생명체. 그 설정 자체는 좋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좀 아쉬웠던 게, 그런 그렘린의 특성과 주인공의 상황 사이가 뭔가 은유적으로 착 달라 붙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에일리언>의 제노모프는 그 자체로 남성기를 상징하고, 또 그 번식 방법이 여성들의 임신 공포를 자극하지 않나. 거기에 리플리는 이미 선내에서 성희롱과 성추행의 뉘앙스를 겪고 있었고. 그 둘의 조합이 너무나도 명명백백해 좋았던 지점이 있었는데, <섀도우 클라우드>는 그 점에서 아쉽다. 물론 모든 크리처 영화들이 꼭 다 그래야한다는 것은 아니지만서도.

아, 여기에 아쉬운 거 하나 더 추가. 주인공이 갖고 탄 기밀품목이 알고보니 그녀의 아기였다는 전개. 여기서는 주인공에 한창 몰입해 응원하고 있던 나로서도 그녀를 욕할 수 밖에 없었다. 대체 어떤 사연이 있길래 격추 당할지도 모르는 군용기에 아이를 태웠냐. 이건 진짜 무책임한 거 아니냐고. 진짜 그럴 수 밖에 없었던 대단한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니라면... 근데 아니나 다를까, 그 대단한 이유는 묘사되지 않는다. 남편에게 가정폭력 당하고 그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그랬다는 이유가 제시 되기는 하는데, 그럼에도 군용기에 아이를 데리고 탄 것은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그냥 자동차나 배 타고 좀 멀리 도망치면 안 됐던 거임? 아니면 하다못해 민간 항공기에 탔어야지... 이 부분이 좀 더 보강 되었더라면 좋았을 것.

그러나 영화가 다시 재밌어지는 건 후반부다. 주인공이 아기 살리려고 비행기 외부로 나가 거꾸로 붙어서 기는 장면은 그게 그린 스크린 앞에서 촬영된 가짜 임을 충분히 알고 있음에도 긴장감 넘쳤다. 이후 군용기 내부로 들어가 생뚱 맞은 음악에 맞춰 그렘린과 요리조리 대결하는 것도 기묘하게 재밌었고. 그리고 화룡점정, 결국 추락한 군용기에서 빠져나와 아기를 데리고 도망치려던 그렘린을 붙잡고 맨손으로 쥐어패는 장면! 세상에 마상에, 크리처를 맨손으로 쥐어패는 진기한 광경이었다. 하다못해 리플리도 퀸을 맨손으로 쥐어패지는 못했었다. 허나 이 영화의 주인공은 한다. 게다가 캐스팅도 힛걸 클로이 모레츠야. 체격이 좋은 배우라 그렘린 줘패는데 진짜 웃기더라. 그렇게 위엄없이 처맞고만 있는 크리처는 정말이지 오랜만이었음.

고로 길티 플레져라고 해야할까? 썩 훌륭한 영화인 것은 아닌데 몇몇 특별한 장면들 때문에 자꾸만 생각나는 영화. 아닌 게 아니라 주인공이 그렘린 뚜까패던 장면은 계속 봐도 안 질릴 것 같다. 심지어 그렘린이 할퀴려고 드니까 주인공이 그거 가드로 막고 다른 손 주먹으로 쥐어팸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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