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03 18:58

비와 당신의 이야기 극장전 (신작)


비와 당신의 구태의연한 이야기.


비와 당신의 스포일러!


초장부터 깜빡이도 없이 밀고 들어와 미안한데,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두 남녀가 편지라는 매개체로 상호 간의 사랑을 키워나간단 이야기 자체도 벌써부터 고루하고 지루하다. 펜팔로 전개되는 멜로 드라마가 좀 많아? <유브 갓 메일>, <러브레터>, <접속> 등등. 심지어 <시월애>와 그 리메이크작인 <레이크 하우스>는 판타지까지 끼얹어 그걸 그려냈었지. 근데 그걸 또해? 아, 물론 또할 수 있지. 또할 거면 잘 만들던가. 

이 촌스러운 영화의 결정적인 실수는, 두 남녀 주인공이 주고받는 편지가 그 둘의 사랑이 커지는 데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단 데에 있다. 서로 감정이 움트고 공감대가 싹트며, 종국에는 사랑이란 결실이 맺어지려면 최소한 편지 내용에는 신경을 썼어야지. 아니, 편지를 통해 자신의 요즘 근황은 물론이고 고민이나 걱정거리들을 교류하는 게 맞는 거 아니냐? 그래야 멀리 떨어져있어도 서로 간의 상황을 알게 되고 거기서 공감이 피어오르는 거지. <비와 당신의 이야기>에 나오는 편지 내용들은 다 같잖게 서정적인 에세이 느낌의 짧은 글들 뿐이다. 죄다 '넌 잘 지내니? 여긴 비가 와. 또닥또닥' 이딴 식이다. 여기에 대한 답장이 더 가관임. '또닥또닥이라는 말, 정말 좋다' 이러고 끝. ......너네 대체 이런 내용의 편지 어느 부분에서 사랑을 느끼는 거니?

각각 서울과 부산이라는 대한민국 대표 도시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 공간적 매력 역시 전혀 담겨있지 않다. 이 영화 속의 그 두 공간적 배경은 다른 도시로 치환 되어도 아무 문제가 없다. 서울-부산 말고, 강릉-전주 이런 식이였어도 아무 상관이 없었을 거라고. 그만큼 서울과 부산이라는 매력적인 두 도시를 제대로 담아내질 못했다. 영화 외적인 부분이지만, 영화를 다 보고나서 서울이나 부산 여행을 가도 도무지 이 영화가 떠오를 것 같지 않다. 두 남녀를 각 도시로 내던져 놨으면 서울과 부산이 각각 그 남녀 인물들을 표현하고 또 상징하는 공간이 되었어야지. 지금은 그냥 둘을 최대한 멀리 떨어뜨려놓기 위해 서울과 부산으로 설정한 것으로 밖에 안 보임.

영화의 시작과 끝을 모두 장식하는 내레이션은 재고의 여지없이 최악이다. 세상에 아직도 이런 연출을 시도하는 영화가 있다니. "이것은 기다림에 관한 이야기다"라고 노골적으로 언급하며 영화를 시작해놓고는 정작 관객들에게 그 기다림을 볼 시간은 안 준다. 사랑이라는 게 첫눈에 반한 것이든 아니면 오랜 시간에 걸쳐 스며든 것이든 간에 그 시작 정도는 진득하게 볼 수 있게끔 해줬어야지. 아니면 한 방에 납득 가능한 연출을 던져놓든지. 근데 영화는 그 무엇도 안 했다. 그냥 서로 사랑했으니 사랑한 거다. 아직도 두 남녀 주인공은 서로를 사랑하기는 하는 건지 잘 모르겠고, 여기에 강소라가 연기한 인물 역시 갑자기 끼어들어 관객들을 난감하게 한다. 아니, 그러니까 강소라의 캐릭터가 매력적이란 건 알겠어. 당차고 관계에 있어 리드하는 여성 캐릭터, 재밌고 좋지. 근데 얘는 왜 남자 주인공을 좋아하는 거라고? 

말 나온 김에, 강소라의 캐릭터는 그 자체로 영화의 밸런스에 붕괴를 가져온다. 분명 홍보도 그렇고 실제 내용도 그렇고 이 영화는 강하늘과 천우희가 각각 연기한 두 남녀 캐릭터의 사랑 이야기처럼 보이거든. 근데 따져보면 천우희 캐릭터의 등장 시간보다 강소라 캐릭터의 등장 시간이 더 길 것 같음. 강하늘 캐릭터와 강소라 캐릭터의 이야기에 더 안배가 많이 되어 있고, 천우희 캐릭터는 일종의 쩌리처럼 여겨진다, 그냥. 그렇다고 앞선 그 두 캐릭터의 관계는 잘 정립되어 있느냐? 그것도 아님. 그 둘이 모텔도 가고 나름 갯벌 데이트도 하고 그러는데 다 재미가 없음. 게다가 장국영 이야기는 왜 넣은 거야? 그냥 뭔가 인상적인 거 하나 넣고 싶었나보지? 그 둘이 장국영의 영화를 봤다거나 이런 것도 아니고 그냥 뜬금없이 장국영 이야기가 쓰윽 들어옴. 이건 대체가...

그외 영화적 낭비들 역시 엄청 많은데, 일례로 각 남녀 주인공 주변의 캐릭터들이 그렇다. 남자 주인공의 아버지와 형 캐릭터는 대체 왜 넣은 걸까? 아버지는 그렇다 치자고. 형 캐릭터는 왜? 갈등도 넣어주고 나름의 이야기도 넣어주고... 이게 지금 펜팔 러브 스토리랑 상관이 있냐? 여자 주인공의 어머니와 친구는 또 어떻고. 어머니는 그 등장 시간과 중요도에 비해 방점이 너무 찍혀있고, 책벌레라는 그 친구 캐릭터는 정말로 있으나 마나 한 인물이다. 그렇다고 개그를 잘 치는 것도 아니고... 프로덕션 디자인도 정말 구리다. 부산에 있는 헌책방은 그냥 넘어가더라도, 남자 주인공이 끝내 개업하게 되는 우산 공방? 에라이, 씨발... 최근 본 영화 속 세트 중 진심으로 가장 최악인 듯. 현실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영화적으로 막 예쁜 것도 아니고. 

그리고 자기랑 펜팔하던 여자애가 죽은 걸로 알고 있었는데 대체 왜 그 해 마지막 날에는 공원으로 나가 비를 기다렸던 거야? 이미 죽은 사람인 거 알면서도 기다린다는 게... 귀신이 되어서라도 돌아오기를 기다린다는 거였나? 여기에 영화의 마지막 장면 역시 최악. 이건 뭐 예쁘기는 커녕 의미심장하지도 않으니...

그리고 여기에 화룡점정을 찍어주는 영화의 에필로그. 이것 역시 영화 외적인 개인의 취향이지만, 나는 언제나 운명보다 인연의 힘을 믿어왔다. 물론 안다, 멜로 드라마는 '운명'의 힘으로 태동하는 장르란 것을. 그럼에도 이 영화는 운명보다 인연의 힘을 믿는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중반까지는.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과 주고받은 편지가 실제로는 다 거짓말에 기반한 것이었잖나. 여자 주인공은 자기 언니인 척 대필 했던 거 아니냐고. 그러니까 그렇게만 쭉 갔다면 그런 부분에서만큼은 내 취향에 가까울 수 있었다. 그러나 영화는 여기에 정말로 있으나 마나함의 절정을 보여주는 에필로그를 추가함으로써 그 모든 걸 다 와르르 무너뜨리고야만다. 결국 그 둘이 운명으로 엮여있던 거넼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진짜 이렇게 얼척 없는 영화는 오랜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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