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03 20:25

미첼 가족과 기계 전쟁 극장전 (신작)


다른 건 다 필요 없었다. 뻔하디 뻔한 가족 중심의 애니메이션 같아보였지만 아무렴 어때. 크레딧에 제작자로 올라와 있는 크리스 밀러와 필 로드 콤비의 이름만이 내겐 전부였다. <하늘에서 음식이 내린다면>부터 시작해 <21 점프 스트리트> 연작을 거쳐 <레고 무비>, 그리고 종국에는 <스파이더맨 - 뉴 유니버스>까지. 크리스 밀러와 필 로드의 미친 유머 코드와 가족 드라마적 감독은 언제나 내게 통했고 때문에 이번 영화 역시 나로서는 기대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스포 가족과 스포 전쟁!


요근래 장르 영화 신작들을 리뷰하며 뻔한 이야기나 설정들에 관해 일갈한 적이 있었는데, <미첼 가족과 기계 전쟁> 역시 상투적인 근간을 갖고 있긴 하다. <터미네이터>와 <매트릭스>로 시작해 이제는 비슷한 영화들로 팔만대장경까지 찍어낼 수 있을 듯한 인공지능 기계들의 봉기에 관한 설정. 여기에 기존 애니메이션들은 물론이고 크리스 밀러 & 필 로드 콤비의 필모그래피 탐독만으로도 이미 그 기승전결이 다 보이는 주인공 가족 설정까지. 영화는 뻔하디 뻔한 것 두 개를 역시 뻔뻔하게 붙여 놓았다. 근데 이것은 일종의 선언처럼 보이기도 한다. 존나 뻔한 내용을 읊는 대신 우린 다른 걸로 승부보겠다는 패기 넘치는 선언.

결국은 스타일이 이 영화의 모든 것이다. 영화는 제작자인 크리스 밀러 & 필 로드 콤비 스타일의 집대성이라 할만 하다. 따뜻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첫인상 페이크이고 그 이면을 거칠고 산만하게 뒤덮다 못해 얽힌 키치한 작화. 끊임없이 반복되는 특유의 동어반복 개그, 인스타그램 등의 SNS는 물론이고 유튜브와 틱톡 같은 나름 최신 플랫폼들까지 싸그리 긁어와 선보이는 젊은 감각, 이미 존재하는 다른 영화와 게임 등을 유려하게 읊어대며 패러디와 오마주의 야바위를 펼치는 메타 요소들까지. 비록 감독 이름은 모두 다르지만 <레고 무비>와 <스파이더맨 - 뉴 유니버스>, 그리고 <미첼 가족과 기계 전쟁>을 크리스 밀러 & 필 로드 콤비의 영화로 볼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이유들이다. 

그러면서도 <미첼 가족과 기계 전쟁>은 더 앞으로 나아간다. 영화의 각종 개그 스타일이 크리스 밀러 & 필 로드 콤비의 기존 영화들에 비해 훨씬 더 간 것처럼 보인다. 반복은 더 과하고, 프레임을 수놓고 또 뒤덮는 각종 요소들은 콜라주를 방불케 한다. 그러니까 영화가 가진 고유의 '과잉'을 잘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이 영화를 즐기지 않고는 못 배길 것. 나 역시 충분히 만족해하며 봤다.

그렇지만 크리스 밀러 & 필 로드 콤비의 영화치고 아쉬운 점이 좀 짙게 남은 영화이기도 했다. 일단 너무 과하다. 앞서 '과잉'의 미학을 가진 영화라고 말하긴 했지만, 좀 심해도 너무 심했지 싶다. 가끔 3절이나 4절 정도까지 하는 건 나름 괜찮은데, 여기서 굳이 5절에 6절 뇌절까지 해버리니 개그는 개그대로 식상하고 영화의 리듬도 막 엉켜버리는 느낌. 게다가 크리스 밀러 & 필 로드 콤비의 필모그래피를 모두 갈아 넣은 것처럼 지나치게 왕도적인 구성을 취하고 있어서, 세부적인 부분들에서는 의외성을 가졌지만 거시적인 관점으로 보면 어쩔 수 없이 전형적이다. 애니메이션이니 주인공들이 대활약해 세상을 구하는 결말까지는 어쩔 수 없었겠지만, 다른 모든 코스들이 다 예측 가능했다는 건 문제이지 않나.

대표적인 게 바로 주인공 가족들의 관계와 그 변화이다. 케이티가 아버지에게 느끼는 감정과 그 변화는 <하늘에서 음식이 내린다면>, <레고 무비>와 <스파이더맨 - 뉴 유니버스> 속 부자 관계와 똑같다. 그러니까 앞선 영화들을 다 본 관객들이라면 충분히 예상되는 지점들이 있는 것. 물론 똑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그게 썩 잘 연출되어 있다면 언제나 힘을 받기 마련이다. <미첼 가족과 기계 전쟁> 역시 연출은 잘 해놔서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데에 무리가 생기진 않았다. 그러나 그럼에도 기존 영화들에서 봐왔던 기승전결과 너무 똑같기만 해서 물리는 건 사실이었음.

여기에 내 개인의 취향에 결정적인 한 타를 제공했던 영화의 후반부. 애니메이션인 걸 고려하더라도 너무 비현실적인 전개가 속출한다. 아니, 평범하다 못해 평균 이하처럼 보이는 가족들이 세상을 구하는 거? 그거 괜찮아. 이해해. 근데 웬만한 적들은 잔인하게 다 썰어버리는 악당 로봇들에 맞서 엄마가 모성애로 각성한다? 그래서 로봇들을 다 쥐어패고 로봇 킬러 서퍼가 된다? 여기서 부터는 내가 받아들이기 좀 힘들더라고. 제발... 모성애나 부성애로 등장인물 헐크화 시키는 거 애니메이션에서는 그만 보고 싶단 말이야.

좋은 영화다. 근데, <레고 무비>와 <스파이더맨 - 뉴 유니버스>를 수없이 반복해서 봤던 것에 비해서는 이 영화를 또 보게 될 것 같진 않다. 귀엽다가 지치고, 지치다가 귀여운 영화. 크리스 밀러와 필 로드가 이 영화로 데뷔한 다른 차원의 우주가 있다면 충분히 즐길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이미 우리의 우주에는 <레고 무비>와 <스파이더맨 - 뉴 유니버스>가 있지 않나. 애초 그들이 쌓아놓은 벽이 너무 높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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