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5/20 12:09

O2 극장전 (신작)


눈 떠보니 나홀로 의료용 캡슐 안. 문이 잠겨 있어 그 밖으로 나갈 수도 없고, 신호가 약해 남들과의 전화 통화도 쉽지 않다. 여기에 산소 농도는 점점 떨어져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 과연 그녀는 이 망할 캡슐 안에서 탈출할 수 있을 것인가.


넘쳐나는 스포!


한 공간에 갇혀 이도저도 못하는 한 인물 만을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폰부스>도 떠오르고 <더 월>도 떠오른다. 하지만 아무래도 가장 많이 겹쳐보이는 것은 <베리드>일 것. 말이 좋아 의료용 캡슐이지, 이거 그냥 <베리드>의 그 관짝이랑 완전 똑같은 거잖나. 거기에는 관 틈으로 쏟아져내려오는 모래와 기어코 비집고 들어온 뱀이 있었지. <O2>는 그 자리에 의료용 AI와 진정제 및 안락사 주사를 놓을 수 있는 기계 팔을 넣어놨을 뿐이다. 말그대로 Replace 했을 뿐. 

그러나 <베리드>와 <O2>는 결정적으로 한 끗이 다르다. <베리드>는 그저 그 상황에 집중 하기만 하면 되는 영화였다. 주인공이 왜 그 관짝에 갇혔는지 따위는 아무래도 중요하지 않았고, 그저 주인공이 그 관짝 밖으로 나갈 수 있는가 없는가 만이 핵심이었다. 그러니까 그건 굉장히 미시적인 재난 영화였던 것. 반면 <O2>에서는 미스테리가 강조된다. 일종의 기억 상실 상태에 놓인 여자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영화는 그녀가 누구이고 또 왜 여기 갇힌 것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고군분투 한다. 그리고 이야기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그 미스테리가 벗겨지면 벗겨질수록 영화는 본격 SF의 색을 강하게 드러낸다. 

고로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미스테리가 중요한 영화였으면, 관객들로 하여금 그 미스테리가 무엇인지를 정말로 궁금하게 만들었어야 했다. 그러나 <O2>의 미스테리는 관객에게 주 동력이 되지 못한다. 나라도 그런 상황에 빠졌다면 당황해 허우적 댔을 테지만, 그걸 감안한다 치더라도 한 영화의 주인공으로서 오미크론 267이 취하는 행동들은 모두 그저 답답하게만 느껴진다. 뭔지 모를 상황 앞에서 패닉에 빠지는 건 이해해, 하지만 자신을 도와주려고 걸려온 전화를 단순히 자기가 빡쳤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수신 거부하는 건 대체 뭔 깡이냐. 이 시점에서 이미 주인공을 응원 하고픈 마음 싹 달아남. 네 까짓 게 죽든 말든 나랑 뭔 상관이람-의 태도로 전환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미스테리들이 드러나는 방식 또한 구태의연하다. 기억을 잃은 주인공의 머릿속에서 단편적으로 떠올랐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기억의 편린들을 통해 주요 미스테리들을 해결하는 방식이 너무 뻔함. 게다가 쓸데없는 부분들도 많았다. 물론 미스테리 장르는 그 쓸데없어 보이는 부분들이 꽤 중요하게 작용하는 장르다. 대놓고 답을 가르쳐주면 안 되니까, 위장과 혼란을 야기하기 위한 방해 공작으로써 필요하다고. 허나 그렇다고 그걸 그냥 막 해도 된다는 소리는 아니지. 계속 반복되어 등장하는 회전하며 떨어지는 단풍나무 씨앗의 이미지는 대체 뭔 필요가 있었냐? 마지막 결말부의 그 이미지를 위해서? 솔직히 그거 보여주나 마나 한 장면이었잖아.

장르가 본격 SF로 환승된 지점부터는 그냥 영화를 놓아버릴 수 밖에 없었다. 개인적으로 이런 거 싫어하거든. 아주 미시적인 이야기를 다루는 것처럼 굴다가 갑자기 거시적인 규모로 빠져버리는 거. 한 여자의 고군분투기에 잘 집중하고 있었는데, 느닷없이 우주 이민선에, 인류 멸망급의 전염병에, 심지어 복제인간까지 소재로 갖다 써버리니 돌연 정신이 아득해졌다. 물론 이런 장르 체인지, 또는 이런 스케일 부스트를 선호하는 관객들도 분명 있으리라. 그러니까 어쩌면 이건 그냥 취향 문제일 수도 있겠다.

1/3 지점까지는 이게 대체 모두 어찌 된 영문일까-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는데, 그 이후 지점부터 나머지 2/3은 될대로 되라지-라는 자세로 볼 수 밖에 없었던 영화. 멜라니 로랑 오랜만에 봐서 반갑고 또 그 얼굴 클로즈업만 무진장 봐서 심지어는 살짝 질리기까지 하는데 어쨌거나 그런 개인적 반가움 따위는 제쳐두고 영화가 너무 별로였음. 여전히 재미있게 보지는 못했었지만, 차라리 알렉상드르 아야의 전작 <크롤>이 더 나았던 것 같다. 차라리 그 영화는 솔직함이라도 있었거든. 미스테리 보다 재난 상황에 좀 더 집중하는 경향도 있었고 말이지.

핑백

  • DID U MISS ME ? : 발신제한 2021-06-29 17:18:11 #

    ... 도 &lt;폰부스&gt;, &lt;베리드&gt;, &lt;더 월&gt;, &lt;더 테러 라이브&gt; 정도가 있고 가장 최근에는 거기다 SF를 넣고 버무렸던 &lt;O2&gt;도 있었지. 그러니까, 이쯤 되면 대부분의 관객들도 이런 종류의 이야기에서 기대하고 또 예상하는 바가 어느 정도 있다는 것. &lt;발신제한&gt;은 관 ...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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